소년왕은 더 이상 소년왕이 아니었다. 소년왕은 소년도, 왕도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여행은 이렇게 일축할 수 있었다.
흉폭한 바람이 급습하는 계절이면 왕궁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빗장을 꽁꽁 걸어잠갔지만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 한 줄기까지 막을 수는 없었고, 겨울이면 왕궁엔 바람 새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얼음궁전. 그 성의 별칭이었다. 겨우내 성에는 모닥불의 훈기가 사그라든 적 없었지만 삭막한 공기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사람은 바람을 어찌할 수 없었고, 불은 냉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성이었다.
왕이 보이지 않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으나 기사는 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로 향했다. 과연 망루 밑에는 시중과 대신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기사는 그들을 물렸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흩어졌다. 예의상으로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땅 위에 딛고 선 것들은 모조리 희박해지는 계절. 왕국의 혹독한 겨울은 사람의 마음도 꽁꽁 얼렸다.
작고 까만 뒤통수가 보였다. 기사는 웃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뒤로 가까이 다가가서는, 기다란 두 팔로 왕을 꼭 끌어안았을 뿐이다. 왕 역시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면 그들은 말수가 적어졌다. 그래도 좋았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바다의 밑바닥까지 잠겼다가 천천히 올라오기까지의 역사를 공유했으므로. 기사는 왕의 옆머리에 입술을 눌렀다가 떼었다. 그때에 바라본 왕의 눈은 먼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왕의 시선을 따라가면 험한 겨울산이 장대하게 뻗어 있었다.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넘기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산이었다. 왕이 그 아득한 산을 응시할 때마다 기사는 더 강하게 끌어안곤 했다. 그런 기사를 저지하듯 뻗어오는 손. 힘은 없어도 위엄있는 손길이었다. 손등과 손마디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요. 기사는 걱정하듯 말했다. 괜찮아. 왕은 얕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기사는 괜찮지 않았다. 기사는 왕의 턱을 잡고 제 쪽을 바라보도록 했다. 기사는 창백한 입술에 키스했다. 겹쳐놓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적어도 입술은 데울 수 있었다. 한동안 입을 댄 채로 있다가 기사는 조심스레 고개를 물렸다. 왕의 시선은 기사에게로 꽂혀 있었다. 왕은 이제 기사의 입을 올려다보았다. 아쉬운 듯 입술을 빤히 쳐다보는 그 눈에, 기사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기사는 꽁꽁 언 왕의 두 귀를 감싸주었다. 귀를 만지작거린 다음엔 귓불로, 턱과 목으로 손을 천천히 내렸다. 왕은 입을 조금 벌린 채 기사에게 온순하게 옥체를 맡겼다. 흐트러진 숨이, 조금 더워진 숨이 공기중에 흩어졌다. 왕은 한 손으로 기사의 목줄기를 잡고 끌어당겼다. 먼저 입술을 대고, 허겁지겁 얽어온 것은 바로 왕이었다. 기사는 왕을 꽉 잡느라고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왕이 우울을 견딜 수 없어 한다는 것이 알아졌다. 견딜 수 없음에도 견뎌야 하는 것, 그걸 견딜 수 없다는 것도 알아졌다. 기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거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왕의 살아있는 고통들. 그것이 느껴지는데도 만지거나 잘라낼 수 없는 것이 서글펐다. 기사는 왕의 허리를 잡고 저에게로 완전히 돌렸다. 덩달아 허겁지겁 입 맞추는 와중에도 로브를 젖혀 저의 가슴으로 왕의 작은 몸을 둘러안았다. 기사에게 왕은 언제까지나 소년 같았다. 아직 앳된 기색이 채 빠지기도 전에 국왕의 자리에 오른 그에게 애면글면했다. 죄악감이 단단히 뿌리내린 자리 위로 첩첩이 쌓인 마음이기에. 처음에는 뒤로 주춤했던 걸음이 이제는 자꾸 왕을 밀었다. 이제 됐어, 그만... 왕은 고개를 빼며 중얼거렸다. 왕을 따라가려던 기사는 그만 멈칫하고, 그에게 주려던 숨을 목구멍 밑으로 도로 넣었다. 기사의 코와 왕의 입에선 하얀 숨이 흩어져 나왔다. 기사는 못내 아쉬워 왕에게 한 번 더 입맞추었다. 나중에. 이따 밤에요. 기사가 말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