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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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이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앞서 우선 밝힌다. 앞으로의 묘사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에 따른 것으로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맹세컨대 거짓말은 한 마디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 이야기가 다 끝난 다음 여러분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임머신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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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2월의 뉴욕을 상상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구닥다리 책의 모퉁이에서 그림을 보거나 영화로밖에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 같은 건물도 없었고 겨울이면 폭설이 내렸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옛 뉴욕 시가지에 눈 내리는 모습을 그려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보고된 세계 최장수 노인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을 통틀어 내가 유일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나는 1899년의 뉴욕을 기억한다. 그때는 아직 중절모 쓴 신사와 드레스 입은 숙녀, 말이 끄는 마차가 거리를 활보하던 때였다. 뉴욕에도 그런 시대가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1899년 12월의 뉴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 나는 강의 중 무심코 내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중얼거린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단지 내가 복고 양식에 관심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확실히 19세기 말미 분위기는 사람들이 복고풍이라고 부르는 양식에 마지막으로 편입될 만했다. 지금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그 시절 사람들의 복식은 우중충하고 흐리다. 염색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로엔 초기 모델 자동차와 마차가 동시에 활보해서 지저분하고 혼잡했다.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그 시절 뉴욕 복식이나 거리를 칭송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돌아갈 길이 없으므로 내겐 더없이 아름다운 시절이 된 그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때에도 대학이 있었다. 1899년 나는 졸업을 앞둔 평범한 물리학도였다. 졸업논문을 쓰고 교수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졸업할 수 있는 것은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내 동기들은 논문 쓰기에 골몰하느라고 한 세기가 저무는 것도 잊고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 쓰다 만 논문을 퇴고하며 수식을 점검했다. 나는 그 일에서만은 예외였다. 당시 나는 L.아커만 교수의 연구 조수로 있었는데, 내 논문보다는 교수님의 연구를 돕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교수는 당시 내가 봤던 사람들 중 가장 천재였다. 나는 그를 천재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 생각은 좀 달랐다. 사람들은 아커만 교수를 괴짜라고 불렀다. 그는 학장에게 아부하거나 학계의 동향에 맞추어 연구과제를 바꾸는 융통성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인의 연구에 골몰하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온갖 잡동사니의 발명가이기도 했으며, 나는 그 시대에 아커만 교수의 연구실에서 전동칫솔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다.
괴짜는 괴짜를 알아본다. 아커만 교수의 한쪽 책상에는 무명 발명가들의 아이디어 도면과 논문 따위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다들 유명 대학의 교수가 자기를 알아봐주길 바라는 뜻에서 자진하여 연구를 선뵈었던 것이다. 그 두루마리 더미 속에는 독일 청년 알베르트의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베르트는 시간에 대한 이론만으로 평생을 떠들 수 있는 그런 괴짜였다. 그는 시간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든 창시자다. 그가 훗날 어떻게 알려지는지는 여러분도 알 테니 굳이 말하지 않겠다. 아직 놀라지 마시라. 알베르트는 아직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에 어느 대학에서건 퇴짜 맞았다. 아직 그는 학자로서의 영향력이 먼지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커만 교수는 자기가 알아보지 못하는 천재가 있을지 몰라, 그 앞으로 오는 모든 논문을 읽었다. 그리고 때때로 직접 검증했다. 알베르트의 이론은 아커만 교수의 새로운 실험대상이 되었다. 그는 알베르트에게서 힌트를 얻어 이른바 시간여행 이론에 매혹되었다.
아커만 교수가 어째서 시간의 역설에 관심이 동했는가 하는 것에는 거창한 이유가 없고, 우리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핫도그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와 비슷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때마침 배가 고프고 핫도그 냄새가 난다면 당연히 핫도그 가게를 찾아가지 않는가. 아커만 교수는 미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미쳐서 발명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평범한 공산품이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것을 궁금해 했다. 시간의 역설이 검증되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그는 자신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는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커만 교수는 증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는 알베르트의 두루마리를 읽은 이후부턴 거의 폐인이 되도록 그 연구에 몰두했다.
아커만 교수가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 나는 그의 충실한 조수로서 그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연구 보조는 기본이고, 끼니를 챙기고 그를 집에 데려다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까지 모두. 나는 지쳐 잠든 그의 얼굴을 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이 나에겐 기꺼웠다. 그렇다, 나는 아커만 교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사람들이 그의 연구를 알지 못하도록 숨기는 일이었다. 그가 세간에 낙인찍히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그의 연구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우리가 진녹색 벨벳 커튼으로 둘러싸인 은밀한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기상천외한 기계들이 쉭쉭 소리 내며 작동하고 분필 냄새가 가득한 그 공간 속에서, 우리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무언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설레던지. 그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공간에서 우리의 시간은 평행하게 흘렀다. 나는 지루한 강의들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아커만 교수의 연구실로 뛰어가곤 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서 그를 위해 쓰고 싶었다.
그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내가 오래 전부터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알고 있었다는 대답 하나만 들으면 온 세상을 얻은 기분일 것만 같았다. 189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 그와 저녁 약속을 잡았다. 나는 새로 맞춘 중절모를 착용하고, 주문 제작한 선물을 찾아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나는 그와 공원에서 스케이트를 탄 다음에 깜짝 선물을 주고, 시내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웬 스케이트냐고? 가끔은 나도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물론 내 계획에 대해서 아커만 교수는 까맣게 몰랐다. 그는 내가 자길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는 연구만으로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약속장소인 공원으로 갔을 때에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왜 이런 데까지 자길 불러냈냐고 투덜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내 중절모가 우스꽝스럽다고 했다. 그는 중절모나 지팡이처럼 예의 차리는 물건들이 유행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러나 그에게 내 중절모를 씌워주었다. 날씨가 추웠으니까. 공원의 얼음호수 위에선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이들을 가리키며, 나는 우리도 스케이트를 타자고 우겼다. 빙판 위의 아커만 교수는 엄청나게 형편없었다. 그는 다섯 번을 연달아 넘어진 다음에는 이런 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스케이트장을 나갔다. 나는 따라갔다.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한테 시간을 낭비해주면 안 돼요? 나는 고백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잔소리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커만 교수는, 내 말을 이해한 다음에 큰 소리로 웃었다. 세상에 너처럼 둔한 녀석은 없을 거다, 하고.
나는 그토록 아커만 교수의 무신경함을 원망했으나 정작 나야말로 둔감함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아커만 교수는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당신이 나를 이해하노라고 내색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자기 집에 들어오거나 얼굴을 쓰다듬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벌써 이렇게 시간을 내서 너를 만나고 있지 않느냐고. 그제야 그 모든 게 이해되는 듯했다. 세상과의 연에는 뜻을 두지 않으면서도 나에게만은 예외를 허락했던 이유. 나였기 때문에. 나였기 때문에. 나는 마침내 그에게 키스했다. 빙판에서 다섯 번을 넘어진 아커만 교수에게. 그런 다음 우리는 손을 잡고 시내로 향했다. 공원을 빠져나가는 뒷길, 그 길은 영영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강도를 만났다.
강도에겐 권총이 있었다. 우리에겐 권총이 없었다. 그 차이가 포식자와 먹잇감을 결정했다. 우리는 가진 소지품을 몽땅 꺼내놓았다. 강도는 내 몸을 마구 헤집어 동전 하나까지 몽땅 털어내게 했다. 내가 아커만 교수를 위해 특별 주문 제작한 선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강도와 실랑이를 벌였다. 그것만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 강도는 몸싸움을 원치 않았다. 아커만 교수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선 바로 그 순간,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싸구려 권총의 메아리가 온 공원에 울려 퍼졌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강도는 전리품을 품에 가득 안고 도망쳤다. 그는 비겁하게 도망치는 와중 아커만 교수의 것이어야 할 물건을 떨어뜨렸다. 아커만 교수의 가슴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하필이면 그 날에, 하필이면 그 장소에, 하필이면 그 시각에 강도가 나타나 우리가 표적이 되어야 했던 일 말이다. 아커만 교수는 왜 생일과 기일이 같아야 했는가? 나는 도대체 왜 그가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내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져 있는 동안 아커만 교수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땅 속 깊이 그의 관이 내려졌다. 거기를 내 눈물로 채우고 나 역시 거기에 빠져 죽고만 싶었다. 내 손에는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다. 시계 뚜껑은 비어 있고, 시계 뒷면에는 아커만 교수의 생일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스케이트를 탄 뒤에 그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물건. 그건 아커만 교수를 그렇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내가 그것을 두고 강도와 실랑이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총을 맞지 않아도 되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내가 모든 원흉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타임머신 연구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아커만 교수의 연구를 이어받아 완성한다면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고 아커만 교수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저주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 희망만이 유일한 빛줄기였다. 나는 진녹색 벨벳 커튼으로 둘러싸인 그 연구실에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그 때가 되어서야 아커만 교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가 그토록 연구에 매달렸는지. 그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의 연구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 적어도 나는 황홀했다.
그리고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서 보는 그림처럼은 아니지만, 나는 타임머신을 완성했다. 몇 년을 폐인으로 지낸 결과였다. 그동안 어떤 시간의 흐름도 알지 못했다. 시간이론의 최초 제안자가 누구였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아커만 교수를 만나러 가던 그날처럼 다시 중절모를 맞추고 머리를 다듬은 뒤 온몸을 씻고 얼굴을 면도했다. 뚜껑이 빈 회중시계도 잊지 않았다. 나는 미래에서 과거로, 그 긴 시간을 돌아, 그 먼 길을 돌아 마침내 그를 만나러 가게 된 것이다. 나는 회중시계 뚜껑에 아커만 교수의 사진을 하나 넣었다. 그런 뒤, 타임머신에 착석하여 1899년 12월 25일 오후 6시로 시간을 돌렸다. 양자장의 막이 나를 감쌌다. 하얗게 빛나는 그 빛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여행은 길지 않았다. 막이 해제되자 나는 공원으로 달려갔다.
호숫가에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는 아커만 교수가 서 있었다. 바로 아까 헤어진 듯 그는 너무도 온전한 얼굴이어서 나는 꿈결같이 그에게 다가갔다. 눈물부터 났다. 아커만 교수는 우스꽝스런 데이트에 대해 힐난하려던 것도 잊고 내 얼굴을 더듬었다.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그는 또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나를 걱정했다. 그는 조금 후 자신의 죽음은 전혀 모른다는 듯, 그 뒤에 내가 얼마나 긴 여행을 하게 되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해서 더욱 나를 울렸다. 나는 그에게 입부터 맞췄다. 내가 그를 어찌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그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우리는 얼음밭이 아닌 눈밭에 나동그라져 뒹굴었다. 나는 줄줄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커만 교수는 갑작스런 입맞춤에 대해 아무 말도 않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공원 뒷길로 이끌었다.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공원 뒷길이 아닌, 북적북적한 앞길을 통해 공원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면 강도를 만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공원의 입구에 다다라 나는 그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최초의 1899년 12월 25일에 건넸어야 할 회중시계를. 아커만 교수는 그걸 눈높이에 들어 보이곤 웃었다. 나는 데이트를 취소하기로 했다. 이제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아커만 교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반대편 길가의 마차를 잡기 위해 길을 건넜다. 마차는 줄지어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첫 번째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그리고 건너편의 아커만 교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리 와요! 나는 그에게 외쳤다. 그는 도로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좌측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질주해왔다. 그가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때 거대한 물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길들지 않은 말이 그를 덮쳤다. 마차가 굉음을 내며 엎어졌다. 나는 황망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차 밑엔 아커만 교수의 손목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파리한 손가락 사이엔 그의 회중시계. 아커만 교수의 두 번째 죽음은 그렇게 이뤄졌다.
총을 든 강도를 피해 대로변으로 나왔는데 대로에서 마차에 치여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벼락을 연달아 맞을 확률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연이 어떻게 두 번씩 거듭될 수 있을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시간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나는 시간여행이 실패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아커만 교수의 두 번째 장례식을 볼 순 없었다. 나는 도망쳤다. 다시 타임머신이 있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나는 타임머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조금 전엔 무언가 실수한 게 분명하다고. 두 번씩이나 벼락을 맞다니 그게 어떻게 사실일 수가 있냐고. 나는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그런 다음 내 타임머신 연구를 검토하고 기계를 손질했다. 이음매마다 정성들여 윤활유를 발라 다음번 여행에 조금의 오차도 없도록 했다. 나는 어서 악몽 같은 시간을 지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시간여행을 감행했다. 나는 세 번째 1899년 12월 25일 오후 6시로 돌아갔다.
아커만 교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단숨에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아커만 교수는 내 어깨를 퍽퍽 때리다가 내가 떨어지지 않자 결국 내 뺨을 쳤다. 그 바람에 입 안의 살이 조금 찢어져 피 맛이 느껴졌다. 나는 아커만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란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으므로 어떤 서운함도 느끼지 않았다. 집에 가서 얘기해요, 단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가 고집을 부렸다. 스케이트 타자며? 나는 그가 스케이트를 싫어하는데 나 때문에 부득불 나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이전의 두 차례 모두 그는 내키지 않았던 줄로만 알았다. 스케이트 탈래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빙판 위에서 허우적댔다. 나는 스케이트를 잘 타는 편이었지만 아커만 교수는 스케이트에 젬병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마치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그가 조금씩 미끄러질 수 있도록 받쳤다. 왈츠를 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금 그와 만나 빙판을 활주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어서 입을 다문 나를, 아커만 교수는 흘끗 올려다봤다. 아까 그건 뭐냐. 놀라서 때렸잖아... 그는 말했다. 내 얼굴을 쳤던 것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사과였다.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랬어요. 아커만 교수는 그만 삐끗했다. 그 바람에 나도 뒤로 휘청했다. 우린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아커만 교수는 대답하지 않고 스케이트에 열중했다. 그가 스케이트를 즐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호수의 어디에서 왈츠를 추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줄도, 딛고 선 얼음판이 얇아지는 줄도 몰랐다. 하물며 얼음이 파삭 쪼개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얼음이 쪼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른발 아래가 푹 무너지는 느낌이 나더니 휘청거릴 새도 없이 우린 얼음호수에 빠졌다. 정확히 어느 순간에 정신을 놓았는지 모른다. 얼마간의 암전 후 깨어났을 때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이 올려다보였다. 눈 뜬 직후의 그런 장광은 나를 무작정 울렸다. 사람들이 뭐라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들려왔다. 누군가 우릴 구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추위가 밀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옆에 아커만 교수가 시체처럼 놓여 있었다. 그의 세 번째 죽음이었다. 왜 그래야 했을까.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라고 하지 않는가. 세 번이나 거듭된 우연을 우연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1899년 12월 25일 오후 6시, 아커만 교수의 죽음은 예정된 것처럼 세 번이나 연달아 덮쳐왔다. 처음 두 번은 우연이라고 우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세 번째가 모든 것이 필연이라고 결론짓는 것 같았다. 똑같이 얼음호수에 빠졌는데 왜 나는 살고 아커만 교수는 죽었는가. 그의 죽음은 예정되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세 번이나 목격한 이후에는 도저히 타임머신에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1899년 12월 25일로 돌아갈 때마다 그의 죽음을 목격해야 한다면 시간을 되돌리는 의미가 없었다. 연구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다시 연구실로 은닉했다.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타임머신의 오류를 찾는 연구였다. 그걸 고친다면 다음번엔 실수 없이 아커만 교수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살고 그는 죽는 역사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미약한 희망에 시달리며 몇 달간 연구를 이어갔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을 때의 어느 아침, 나는 마침내 타임머신의 도면을 책상에 바르게 펼쳐놓았다. 타임머신 연구에는 결함이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창밖의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눈이나 얼음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내 시간은 여전히 1899년 12월 25일에서 멈추어 있는데 바깥은 변해 있는 것이 무서웠다. 그토록 멀쩡한 세상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리바이 아커만이 죽는 1899년 이후의 세상을 견디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처음 시간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주변을 정리하고 머리칼을 다듬었다. 리바이 아커만의 이름을 새긴 시계는 항상 가슴 속에 넣고 있었다. 오랜만에 거울에 비쳐본 내 모습은 서른 살도 넘어 보였다. 나는 타임머신을 덮고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그리고 이번엔 시계를 1896년으로 설정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아커만 교수를 만나던 그 날로. 1900년에 돌파하기 직전까지 나는 다시 아커만 교수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아커만 교수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끝을 지키지 못한다면 처음이라도 사수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전과 달리 열렬하게 구애했다. 우리의 시간은 1899년 12월 25일이라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아커만 교수가 시간여행 이론에 집착하지 못하도록 갖은 수를 썼다. 매일 그에게 도착하는 괴짜들의 편지와 논문을 낱낱이 읽어보고, 그 중에서 독일 청년 알베르트 E.의 논문을 걸러내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아커만 교수는 내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알베르트의 논문을 입수했다. 알베르트의 논문이 아커만 교수의 마음을 끌리라는 것 역시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만 필연인 줄 알았더니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요소가 필연이었다. 시간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아커만 교수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알베르트의 논문에서부터 어느 천문학자의 연구서, 길거리에 있는 시계방 같은 것들 모두가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는 아커만 교수가 타임머신 연구에 매혹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물의 당연한 흐름을 개인이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1899년 12월 25일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아커만 교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시간이 4년이나 있었는데도 어떤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그 시간의 한계 속에서 열렬히 사랑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다음 그는 내가 예상치 못한 방법을 골라가며 갖가지 죽음의 형태를 보여줬다. 리바이 아커만의 죽음은 언제나 절대적이며, 나는 그걸 바꿀 수 없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난 다음에야 나는 그 진리 앞에 굴복했다.
나는 아커만 교수가 죽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서 그와 다시 시작했다. 다만 이전과 똑같이 4년 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내가 세상의 흐름을 역류한다고 해서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내 외모는 착실하게 나이를 먹었다. 더 이상 대학교 신입생으로 속일 수 없는 외모가 되자 1898년이나 1899년 초반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내 사랑은 깊어지면 깊어졌지 결코 얕아질 수 없었다. 나는 1899년 언저리의 시간대를 무력하게 맴돌았다. 아커만 교수의 타임머신 연구를 돕는 척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비밀공간에는 완성품인 타임머신을 숨겨놓고 있었다. 나는 언제든 과거로 돌아가서 그와 재회해야 했으니까. 시간여행은 몸에 배어 습관이 되었다.
그에게선 항상 분필 냄새가 났다. 그는 연구실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커다란 칠판 앞을 오가며 온갖 공식을 쓰고 계산했으므로 하루가 저물 무렵이면 그의 재킷은 분필가루투성이가 되곤 했다. 기억할 수 없는 어떤 하루에, 나는 그가 재킷을 터는 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바이, 고백할 게 있어요. 난 미래에서 왔어요. 아커만 교수는 손을 멈추었다. 조금 놀란 눈이었다. 당신의 타임머신 연구는 성공했어요. 그걸 알려주려고 내가 미래에서 왔어요. 아커만 교수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더니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증명해봐. 이번엔 내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가 시간여행을 거듭했던 그 모든 순환역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조금씩 나이든 내 얼굴과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밖에는 증거가 없는데. 재처럼 시꺼멓게 타 있을 속을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타임머신을 보여준대도, 그가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대도 그 시기가 1899년 12월 25일 이후인 한은 그는 미래를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는 결코 죽음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시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아졌다. 죽음은 도망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를 일말의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또 다시 무언가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죽고만 싶어졌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미래에서 왔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몇 걸음 떨어진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안고 부드럽게 입 맞추었을 뿐이다.
나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이 과거를 거듭했다. 내 본래 나이도 잊게 되었다. 그의 죽음 직후나 직전에 도망쳐서 과거로 왔지만 그 순간을 셀 수 없이 맞이하려니 정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여행할 기력이 동나는 때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타임머신에 다시 오르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해졌다. 나는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시간을 순회했다. 차근차근 기력을 소진시켜, 마침내 마지막 여행을 결정하게 될 때까지.
나는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도록 그를 사랑했다. 우리의 마지막 1899년. 나는 딱 일 년만 더 유예하기로 했다. 그 때만은 마음이 더없이 편했는데, 나는 이미 다시는 과거를 거듭하지 않기로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흐름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연구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이미 완제품인 타임머신을 발명했으므로, 그에게 약간의 힌트를 흘려 연구를 진척시켰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2월 24일에 타임머신을 완성시켰다. 나는 그에게 타임머신을 타보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의아했다. 그가 숙명처럼 매달렸던 연구가 이제야 완성됐는데 왜 시승할 생각을 않는지. 그가 옳았다는 증명을 한 발 앞에 둔 순간이었다. 그는 나직이 대답했다. 그냥, 여기서 미래를 기다릴래. 그가 전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연구해 왔는지, 아니면 막상 완성품을 대하자 마음이 바뀌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 역시 그의 결정이기에 나는 존중했을 뿐이다. 나는 어떤 것도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랐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결정들이 내 곁을 평행하게 흘러가도록 두었을 뿐이었다. 나는 흐름 속에서 우리가 한때 같이 있었으니 그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나는 대답했다.
하루가 지나 1899년 12월 25일 오후6시가 왔고, 그는 정해진 죽음을 맞았다. 그 무렵 나는 깨달았다. 내가 리바이의 죽음을 막을 수 없던 이유는, 그의 죽음에 대한 결과가 동시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타임머신을 만든 것은 리바이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가 살았다면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임머신이야말로 그의 죽음에 대한 더없는 결과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타고 과거로 가서 그를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의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는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던 것이다. 결과는 원인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타임머신은 아커만 교수의 죽음을 거스를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이치를 왜 그렇게 오래 걸려서야 알았을까. 타임머신이 아커만 교수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음이야말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인데.
더없이 확실한 증명을 얻은 이후,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상처로 점철된 시대에 더는 발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던 공간과 시간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나는 리바이를 만나러 갈 때 언제나 그러했듯,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면도한 뒤 다시 타임머신에 올랐다. 그리고 순리대로라면 나 역시 영영 닿을 수 없는 그런 시간대로 기계를 설정한 뒤 레버를 당겼다. 눈을 감아도 눈이 멀 것 같은 빛의 장막을 통과했다.
아커만 교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자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었다. 어느 겨울 학기의 마지막 수업, 그는 학생들을 늘어놓고 이런 말을 했다. 우리에겐 모두 타임머신이 있다. 우리를 과거로 인도하는 것은 기억이고, 미래로 인도하는 것은 꿈이다. 나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말에서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한때 꿈에 이끌려 살았고 한때 기억에 이끌려 살았다. 나를 마지막 시간여행으로 인도한 것은 기억과 꿈의 중간쯤 위치하는 그 무엇이겠지. 내가 미래의 뉴욕에 닿아 가장 먼저 한 일은 타임머신을 파괴한 것이다. 나는 이 손으로 직접 타임머신을 파괴시켰다. 그런 뒤에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있을지 둘러보기 시작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건 나의 업과도 같았다. 나는 새로운 세상의 진리들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시대에 정착하여, 대학의 교수가 되어 여러분을 이끌고 여기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
박물관 한구석에 편하게 앉아 교수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학생들은 얼떨떨한 표정들을 지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그렇게 끝나자 그만 맥이 탁 풀린 것이다. 학생들은 옆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며 혼란스럽게 수군거렸다. 교수가 방금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이냐는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급기야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학생들도 속출했다. 엘런은 그런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듯, 뒷짐을 지고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농담은 이쯤 하고, 이제부터 자유 견학 시간이다. 각자 마음에 드는 전시관을 골라 리포트를 써라. 자유 주제, 10페이지 분량, 이번 주 금요일 18시까지 내 연구실로 제출하도록.”
“아 교수님!”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엘런 예거 교수는 괴짜로 유명한 교수였고, 그의 수강생 절반은 그에 대한 호기심에 강의를 신청하곤 했다. 오늘의 현대과학박물관 견학도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단지 오늘 날씨가 맑았고, 엘런이 갑자기 박물관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학생들을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일 뿐. 리포트 과제 역시 변덕처럼 생겨난 것이라 학생들은 아우성을 쳤다. 엘런은 괴짜라곤 해도 성적에 있어선 냉정한 교수였다. 학생들은 갑작스런 과제 이야기에 혼돈의 지경에 이르러서 이럴 순 없다고 절규했다. 엘런은 시계를 흘끗 보곤 학생 하나를 지목했다.
“질문 있나?”
“방금 그 이야긴 뭐였습니까? 완전 교수님 본인 이야기처럼 말씀하셨잖아요!”
학생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다시 정신이 든 학생들이 곳곳에서 동조하는 목소리를 냈다. 학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항의했으므로 엘런은 일단 학생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더 말할 게 뭐 있나? 당연히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한 거지.”
“그치만 저기에 아커만 교수가 있잖아요!”
또 다른 학생이 손을 뻗어 엘런의 등 뒤를 가리켰다. 거기엔 최초로 타임머신 이론을 내세운 것으로 알려진 L.아커만의 초상화와 타임머신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엘런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글쎄,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니까. 난 여러분이 이렇게까지 경청할 줄은 몰랐어.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워. 장난으로 시작한 이야긴데 여러분은 나를 막지도 않고... 교수가 앞에서 헛소리를 하고 있으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용기가 있어야지.”
엘런은 뻔뻔하게 말했다. 학생들은 엄청나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내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부 심각할 정도로 순진한데.”
엘런은 학생들을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분이 나빠진 학생 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넓은 통로로 쿵쿵 걸어갔다.
“자네들도 얼른 해산해. 한 시간 후면 전시관 마감이니까.”
엘런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가 비둘기를 쫓는 것처럼 박수를 치고 학생들에게 손을 휘휘 저으니, 학생들은 모든 관심이 식었다는 듯 대놓고 투덜거리며 각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찜찜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교수의 얼굴을 괜히 한 번씩 돌아보다가 이내 근방의 전시관을 향해 흩어졌다. 자리를 정리하는 척, 마지막까지 남아 시간을 끌던 학생 서넛이 엘런에게 다가왔다.
“교수님, 방금 진짜 거짓말 하신 거예요?”
“그럼 그게 사실이게?”
엘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학생들은 교수의 황당한 표정을 보고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했다.
“올해가 몇 년인가? 1899년이면 도대체 몇 백 년 전이냐고. 내가 뱀파이어는 아니잖나.”
“뱀파이어일 수도 있고 그 비슷한 무언가일 수도 있죠. 교수님, 그 이야기는 결코 거짓말 같지가 않아요.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죠?”
학생이 따지듯 말했다. 엘런은 정말로 난처한 듯 목덜미를 문질렀다.
“글쎄... 아커만 교수가 당시 타임머신 연구자였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아커만 교수에 대해 관심 있다는 것까지가 진실이겠지.”
엘런은 등 뒤의 그림을 가리켰다. 과학박물관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 사람이니 L.아커만 교수는 분명 실존했던 인물인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거짓말은 안 하겠다고 맹세하셨잖아요.”
“그래야 여러분이 믿을 테니까.”
엘런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학생들은 그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허탈하다 못해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알겠네, 알겠어. 다신 이런 장난 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럼 됐지?”
그러면서 엘런은 허공에 오른손까지 곧게 들어 보이는 것이다. 학생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음을 깨닫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 어서 각자 할 일 하러 흩어져. 시간은 부족하다고.”
“저희 시간 뺏은 게 누군데요!”
학생이 다소 반항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엘런은 기분 좋게 웃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학생들은 모든 흥미를 잃고는, 엘런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홀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학생이 해산한 다음에야 엘런은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것은 엘런이 가끔씩, 아주 가끔씩 마음이 동해 하는 장난이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특별한 여행자인 양 아커만 교수와 타임머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학생들은 흠뻑 빠져들곤 했는데, 이야기를 다 듣고 전말을 알았을 때의 그들 반응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그 얼빠진 표정들은 언제나 우스웠다. 엘런이 학생을 쉽게 속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엘런이 괴짜 교수라는 평판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역사에 획을 긋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포부를 갖고 연구했던 위대한 과학자들이 연대순으로 늘어서 있었다. L.아커만 교수 앞의 공간은 금세 휑뎅그렁해졌다. 엘런은 얼마간 아커만 교수의 얼굴을 응시한 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엘런은 손을 뻗어 그의 차가운 얼굴을 더듬었다. 초상화는 그의 얼굴을 그럭저럭 잘 담아낸 편이었다. 엘런의 기억을 상기하기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엘런이 과학박물관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홀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금속 시계였다. 복도에 붙어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리바이의 초상화와 시계가 함께 보였다. 엘런의 궤도를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한 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엘런은 오래된 화석같이 멈춰 있는 리바이의 얼굴을, 시계의 분침이 몇 바퀴나 공전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천천히 소멸하는 시간을 그저 무연히 응시하는 것이다. 눈앞에 멈춰있는 물체들 틈에서 엘런은 언제든 1899년과 현재를 오갈 수 있었다. 엘런은 어떤 경지에 이르도록 시간에 대해 사색하거나, 꿈꾸거나, 기억했다. 학생들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농담처럼 고백했던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런은 초상화가 보이는 자리에 마음껏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다시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또 올게요.”
엘런은 작게 속삭였다. 다시 리바이의 얼굴을 한 차례 쓰다듬었다. 그리곤 미련 없이 돌아서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언제든 지킬 수 있는 약속이 그 자리에 있으므로. 엘런은 언제든 돌아와 리바이를 만날 수 있으므로. 엘런은 자신을 인과의 굴레에 밀어 넣었던 기계를 직접 파괴했다. 그러나 엘런에겐 여전히 타임머신이 남아 있다. 그것은 엘런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진리처럼 존재한다. 비록 그는 파괴되었지만 엘런의 기억 속에서 영원하다. 그는 엘런을 자유자재로 인도한다. 엘런에겐 타임머신이 있다. 그러므로 엘런은 거대한 시계의 초침소리를 뒤로 하고,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홀가분히 걸어갔다.
*Fin.
“우리에겐 모두 타임머신이 있다.
우리를 과거로 인도하는 것은 기억이고,
미래로 인도하는 것은 꿈이다.”
- Time Mac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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