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쓴 심야식당과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T시에 관한 기억을 헤집으면 온통 먹색이 쏟아진다. 어떤 기억이든 어두운 배경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T시의 명물이 다름 아닌 비인 까닭일 것이다. T시에 비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겨울에도 눈 대신 비가 내리는 곳이었다. T시의 사람들은 두 부류였다. 비를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매번 성가신 것으로 여기거나. 후자인 사람들은 대개 T시에 오래 발붙이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떠났다. 말하자면 비에 적응하든지, 비로부터 도망치든지 둘 중 하나였다. T시엔 전자를 선택한 사람들이 남았다. 그들이 비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비의 습성은 사람을 땅 밑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골수까지 스미는 우중충함을 견디면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런 젠장맞을. 비가 올 때면 사람들은 도처에서 투덜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그들의 손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의 손엔 생업이 들려 있었다.
물 많은 곳엔 귀신이 많다고 했다. T시는 바다와 인접해 있는데다 비까지 많이 내렸다. 그래선지 T시엔 괴담이 많았다. 대부분 신빙성은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것들은 꽤 재미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듣고 나면 음산했다. 숱한 괴담 중에서 리바이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T시에선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리다는 이야기였다. 비는 음기가 세서 귀신과 친한데, 알고 보면 T시는 귀신 천지라는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바이는 그만 납득했다. T시에선 죽음이 드물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한 귀퉁이에선 사람이 곧잘 죽어났다. 찔려 죽는 사람도 있었고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고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사인은 제각각이었다. 그러니 억울하게 죽은 넋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한대도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리바이는 T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리다기보다는, T시는 저승과 인접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죽음에 노출되어 있었다. T시 사람들은 죽은 존재와 아직 죽지 않은 존재로 양분된다. 말하자면 T시는 우범지대였다. T시에는 죽음과 활기가 모순처럼 공존했다.
T시는 비 말고도 불야성이 명물이었다. 흐린 낮보다 시커먼 밤이 오히려 환했다. 완전히 어두워지고 난 후 거리는 어찌나 화려한지 보는 것만으로 눈이 핑핑 돌았다. 퇴폐와 향락이 전염병처럼 번진 지 오래였다. 흔히들 말하는 유흥가가 불야성의 주역이었다. 그곳은 낮 내내 죽은 듯 잠자다가도 밤이면 반짝 깨어났다. 그곳엔 흥청망청 돈 쓰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쏟아졌고, 그곳 사람들은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곳에선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거래됐다. 목숨이나 약속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짐짓 젠체하는 사람들이 사회악이라 낙인찍는 것들이 T시에는 그득했다. 양과 음으로 구분 짓는다면 대부분 음에 속할 것들. 그러나 리바이가 보기에 그것은 필요악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명실상부한 T시의 원동력이었다. T시는 그런 도시였다.
화려한 거리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구식 건물이 즐비하다. 이승과 저승처럼, 그곳은 뒤편의 별천지와는 완전히 딴 세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개발사업대상에서 배제된 지역인데, 30, 50년씩 된 건물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부분 목조주택이다. 그러나 전부 집인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도 작은 상업가가 형성되어 있다. 밤새 사람을 접대하는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그곳에 리바이의 식당이 있다. 리바이는 그것을 나쁘지 않은 업이라 여긴다.
영업하기 위해선 초저녁부터 준비해야 한다. 그날도 해가 지기 전에 장을 봐 오는 길이었다. 청승맞은 봄비가 죽죽 내리던 터라, 한 손을 우산에 내주고 다른 손은 짐을 들었기 때문에 좀 불편했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리바이는 그날 할 요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왔어요?”
마치 손님 반기듯 인사하는 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리바이는 가게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했다. 귀신처럼 알고 왔군. 리바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날은 마침 손이 많이 가는 탕국을 끓이려던 참이었다. 리바이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으나 그는 내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엘런은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는데, 리바이가 마음먹고 요리하는 날만 피해서 찾아왔던 것이다. 작정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렇게 절묘하게 피할 수 있을까 싶었다. 엘런은 지극히 평범한 날에만 찾아와서 지극히 평범한 요리만 먹고 가기 일쑤였다. 도무지 먹을 복도 없는 놈이었다. 이런 날도 다 있군. 리바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낯짝 한번 보기 좋군.”
리바이는 엘런을 흘끗 보곤 재료 정리를 시작했다. 드물게 엘런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입가가 터져 있는 것이 아주 흠씬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도 생기가 없었다. 입가에서 나는 피와 깜박이는 눈꺼풀이 아니었다면 시체처럼 보였을 얼굴이었다. 보름 만에 다시 본 얼굴이 그새 상해 있는 것 같았다. 딱히 얼굴을 다친 연유를 알기 위해 말한 것은 아니었다. 엘런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리바이의 손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구경했다.
그날 엘런은 좀 오래 있다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리바이에게 저녁을 먹으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고는 한숨 자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엘런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리바이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했다. 낡은 집에선 어디를 밟아도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느릿하고 길게 이어졌다. 내색은 않지만 엘런이 단단히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런은 말보다는 행동거지로 드러내는 놈이었다. 리바이의 머리 위에서 가느다랗게 끼익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엘런이 자리를 펴고 누운 듯했다. 요즘은 날이 궂어서 요를 볕에 말릴 겨를도 없었다. 습기를 머금은 요는 눅눅할 터였다. 그날 리바이는 공들여서 육수를 우렸다.
엘런은 소위 말하는 건달이다. 으르기와 손찌검을 업으로 삼는.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지만 그것에 따른 대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세상엔 그런 직업도 있었다. 어떤 희생을 하든 보상받는 것은 없고 오히려 보복만 당하는 것이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제아무리 본분을 다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남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돌아오는 것은 수많은 원망밖에 없었다. 엘런은 외줄에서 곡예를 부리는 광대처럼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는 있지만 언제든 외줄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엘런은 광대보다도 못했다. 최소한 광대는 박수를 받지만 엘런은 그럴 수 없다. 박수는커녕 단지 불야성의 한 장면으로 편입될 뿐이다. 엘런이 왜 외줄타기 하는 광대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선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은 빚으로 시작했다. 엘런은 사라진 그의 아버지 대신 인질로 잡혔고, 1억을 갚는 순간까지 그 조직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엘런은 어린 소년일 적부터 칼 쥐는 법을 배웠다. 엘런은 거기서 1억 어치의 노동을 한 다음에도 그 일을 관두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런은 거기에 끌려든 순간부터 자연스레 목숨을 저당 잡힌 팔자가 된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 일, 안 그만두냐? 리바이는 지나가는 말로 물은 적이 있다.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엘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만두면 뭐요. 뭐긴... 그냥 남들처럼 일하고 사는 거지. 리바이가 말하자마자 엘런은 크게 웃었다. 그만큼 허무맹랑한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킬킬대고 웃었다. 엘런은 자신의 팔자가 뒤틀린 순간부터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리바이는 엘런의 세계를 이해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엘런의 어둑한 인생에 대고는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았다. 위로하기엔 엘런의 업이 지독하게 많았다. 엘런이 이따금씩 배가 고프다고 찾아오면 따뜻한 음식을 내어주는 것 정도가 리바이의 최선이었다.
개점시간이 임박해 리바이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섯 평 남짓한 공간 한가운데 요만 깔아두고, 엘런은 그 위에 옷도 벗지 않고 누워 자고 있었다. 요 옆에 양복 재킷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벌써 다 구겨졌겠지만 옷걸이에 걸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리바이는 엘런의 재킷을 들었다. 하얀 조각들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것이 무언가 싶어, 리바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발밑을 살폈다. 재킷에서 떨어진 것은 벚꽃 잎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든 것이다. 리바이는 잠시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았다. 정말로 봄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약간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불어왔다. 비에 젖은 공기는 신선했다. 리바이는 엘런 옆에 쪼그려 앉았다. 위협할 때는 맹수처럼 무서운 녀석이 칠칠맞게 꽃잎 따위나 달고 다니는 꼴이 우스워서, 리바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엘런의 머리칼 속으로 손을 넣고 쓰다듬고 싶었다. 고양이를 다루듯이. 그러나 엘런은 고양이가 아니었다. 깨우지 않았는데도 엘런의 눈꺼풀이 열렸다.
사납게 뜨이는가 싶던 눈은 곧 리바이를 발견하고 누그러진다. 엘런은 허공에서 눈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귀신인 줄 알았네.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네가 할 소린 아냐... 너나 잘해.”
리바이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은 엘런의 입에 가 있었다. 맞아서 터진 자국.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것 같은 상처였다. 얼굴에 흠이 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베이거나 찢어진 것보다는 나았다. 그보다는 빨리 낫고 흉터도 남기지 않을 테니까. 엘런은 몸을 좀 틀고 코를 킁킁거렸다.
“이불에서 좋은 냄새 나요. 빨았어요?”
“비 냄새가 밴 거다. 넌 이런 게 좋냐.”
“그냥 좋은 냄샌데.”
“좀 좋은 걸 좋다고 해라. 궁상맞게...”
엘런은 별안간 표정을 거두고 리바이를 응시했다. 엘런이 무표정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려와서 밥이나 먹어.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엘런은 팔꿈치를 세워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리바이의 어깨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그때까지 쪼그려 앉아 있던 리바이는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엘런의 코가 어깨춤에 닿는 바람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일이 아닌데도. 리바이는 당황한 것을 티내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엘런은 리바이의 다리 사이에 들어앉아 코를 킁킁거렸다. 제 영역을 확인하는 짐승처럼. 얼마 후 엘런은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물렸다.
“내 말이 맞아요. 비 냄새가 아니라 당신 냄새예요.”
엘런은 요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리바이의 코 앞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지.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았다. 엘런은 다시 코끝으로 리바이의 쇄골을 더듬었다. 확인하듯이 깊게 들이마시는 숨에 빨려들 것 같았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리바이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숨을 참아보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마하려 했다. 리바이는 애먼 양복재킷을 쳐다보았다.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넌 뭘 하고 다니길래-”
거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었다. 엘런은 예고 없이 리바이에게 키스했다. 입에선 물컹한 감촉 말고도 비린 맛이 났다. 리바이는 벌써 수도 없이 엘런과 그런 상황에 놓였던 것을 떠올린다. 또 어쩌다 이렇게 됐지. 빠르게 익숙해지는 피맛을 느끼며 리바이는 멍하니 생각했다. 엘런의 입술 말고는 리바이의 몸엔 아무것도 닿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리바이는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입끼리 붙어 있는 것이 좋았다. 그 순간에는 그저 좋으면 그만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세간에서 엘런이 어떤 존재건 그곳에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엘런은 리바이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고 리바이는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얌전히 혀를 얽었다. 약해진 빗발 소리와 젖은 살이 비벼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식당엔 벌써 손님이 몇 와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도 있었고 벌써부터 술병을 찾아 따라 마시고 있는 사내도 있었다. 바로 뒤편의 유흥가로부터 잠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다. 이층에서 잠시 한눈을 파느라 잊고 있었지만 그곳은 식당이었다. 식당엔 허기진 사람들이 찾아든다. 곧 뒤따라 내려올 엘런도 몹시 배고플 터였다. 오랜만에 식당이 붐볐다. 손님을 대접해야 했다. 그들의 속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이 리바이의 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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