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격 통온을 끝낸 뒤의 탈력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내가 진격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연초에 끝났을 것이다. 엘런리바 덕질의 끝장을 본 것 같은데 박스째 쌓인 재고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통판으로 거의 정리하긴 했지만, 계획했던 것만큼 청산하지 못한 데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취는 지극히 개인적이었고, 이 이후로는 진격 쪽 글은 들춰보기도 싫었다.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생각하다가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이만하면 많이 했고, 더는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이란 걸 늦게 깨달았다. 봄은 그래도 계속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탈력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무력하게 보냈다. 생업에서의 여건도 느긋하게 덕질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도 하고... 아무튼 이 때로는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다.
2. 그 후 기분전환 삼아 나루토를 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정주행했던 게 한 5년 전인데, 이제는 나루토와 사스케보다 훌쩍 큰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서사를 지켜보니 이만한 대서사시가 없는 것이다. 원수지간으로 시작해 전승되는 운명을 발견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복수밖에 몰랐던 어린아이가 세상을 포용하게 되는 이야기... 나는 일찍이 이만한 사랑노래를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의 서사는 정말이지 묵직하게 내 머리를 후려쳤고 이만한 트루러브를 왜 일찍이 알아보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자연스런 수순으로 나루사스에 입덕했다. 엘런리바가 먼 길을 걸어가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나루사스는 그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사랑하도록 허락된 이들의 이야기 같달까...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나루사스의 수정처럼 반짝이는 순정에 완전히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3. 내 글쓰기의 시작은 학원물이었다. 2차에서도 항상 학원물을 쓰고 싶었으나 진격은 장르가 장르다 보니, 또 둘이 나이차가 나다보니 마음놓고 학원물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루사스에서는 학원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능한 것이다... 조금씩 학원물을 쓰기 시작하면서, 굳은 머리를 풀겠다고 무진 애를 썼다. 초여름에 쓴 글들은 몹시 어색하다. 글이라고 꺼내보기에도 민망한 구석이 있다. 장르를 옮겨가 새로운 환경에 마음을 붙이기 위해 애썼던 과정들이었다. 나루사스의 사랑은 72권에 걸친 원전이 있기 때문에, 나는 원전의 나루사스에게 2차창작의 요소를 조금 가미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나루사스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호카게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마음에 드는 글도 나왔다.
4. 가을이 되면서부턴 힘이 났다. 폭염이 지난 후의 깨끗한 가을은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 무렵부턴 일도 마음 편하게 다니기 시작했다. 올 가을은 단풍이 짧았지만 나는 계절이 가을인 것만도 좋았다. 일 년 중 가장 쾌적한 계절. 지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본격적으로 키사이타, 이타데이와 같은 여러 커플링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중 시스이타 입덕은 정말로 뜻하지 않았던 일로서 나는 아직까지도 내가 시스이타 글을 써놓은 걸 믿을 수 없다. 원작에서의 시스이를 생각한다면 시스이타는 거의 전적으로 동인녀의 상상으로 개척해가야 하는 세계였기 때문에.. 커플링을 파기 위해 임의대로 시스이를 해석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타치 외전에서의 시스이타에서부터 시작된 해석은 꽤 넓게까지 번져갔다. 시스이와 이타치가 상호작용하던 모습, 그 단편적인 장면에서부터 글들이 나오리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시스이가 이타치의 인생에 남긴 인상이 워낙 강렬하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수ㅍ배ㅅ이나 토ㅁㅣㄴ호처럼 내가 단순히 선호하는 커플링이 있고, 내가 글쓰기에 어울리는 커플링이 있는데 시스이타는 아마도 후자 쪽인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큰 고민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원작의 힘 덕분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시스이타를 팔 것 같다. 무엇보다 이타치를 2차창작적 요소로 상상하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5. 진격에서 더는 글을 못 쓰겠다고 생각한 이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쥐어짜낼 것이 없었다. 억지로 써낸다한들 과거의 복제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진격에선 정말로, 내가 말할 수 있는 걸 다 말한 것 같다. 여전히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출력하는 힘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다. 2017년 하반기에는 새로운 장르에서, 계속해서 글을 쓸 힘을 얻는다. 가능성이 스스로에게도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완결될 글을 쓸 수 있도록 수련해야겠다. 목표했던 경지까지는 아직 까마득하게 멀다. 글을 쉬는 동안 스스로의 역량을 돌아볼 수 있었는데, 역시 이 역량으론 안 되겠다는 것이 결론이다. 더 읽고 쓰고 해서 올해에는 나루토 책도 내고... 나루토를 십 년이 넘게 봤는데, (중간의 탈덕 기간은 차치하고) 그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이 참 재밌고 우습다. 내겐 십 년 넘게 묵은 나루토 해석이 있다는 데서 자신감이 붙는다. 적어도 이런 식으로 덕질해도 될까 하는 의문은 들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해보자는 의욕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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