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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enchanted

2018 연말결산



Trigger man / 시스이타

"더 이상 이타치는 삐걱거리는 관절의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살아있는 슬픔이 온몸을 덮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모든 고통들을 압도했다. 그를 압도하는 존재가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

1월 1일 정초부터 덕질을 하고 싶어서 쓴 글이다. 시스이와 이타치는 원작부터가 혹독한 인생의 주인공들이라 거친 발톱으로 할퀸 것 같은 정서에 이입하기가 쉬웠다. 누구도 우치하의 청년들 앞에선 할 말이 없어질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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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 시스이타

"눈의 나라도, 눈의 산도 모두 더없는 환상같지만 이타치와 시스이에겐 더없는 현실이었다. 그것들이 마치 거짓말같다는 감상은 그들에겐 무용했다. 그들은 실제로 눈의 나라에 있었고, 눈의 산 깊은 안식처에서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설국이라는 단어가 끌고오는 정서와 서사에 착안했다. 눈의 나라의 해묵은 전설, 눈에 압도되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숨막히게 아름다운 설원, 눈의 결정처럼 깨끗한 순수와 켜켜이 쌓이는 역사... 이런 배경에 원작의 인물관계를 최대한 끌어오고자 했다. 이타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나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했고, 그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는 이야기. 어느 글을 쓰든 <동방견문록>이 갖고 있는 의미를 언급해보고 싶었는데 설국에서 소재로 쓰게 되었다. 동방견문록의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고, "황제, 국왕, 공작, 후작, 백작, 기사, 시민들 그리고 여러 시대의 인간들과 여러 지역의 다양함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분들이여, 이 책을 잡고 읽어보라."는 진짜 이 책의 서문이다. 설국의 방향성은 이 문장이 결정지었다고 해도 좋다.

모든 문장이 인과관계를 갖고 있어야 하고, 쓸모없는 문장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설국에서의 이야기는 이 생각에서 벗어난 점이 없다. 처음부터 느리고 길게 진행하는 글인데, 설국을 쓰면서 편당 1만 자로 끊는 호흡에 적응했다. 눈이 자주 내리는 겨울이어서 좋았다. 보류중이라 안타깝다. bgm은 원령공주 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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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시스이타

"우치하 사스케는 시스이에게 돌파구이자 막다른 벽이었다. 1998년 1월 31일 오후 8시는 시스이에게 절대적이었다. 그는 그날이 어떤 한도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죽이기 위해 또는 기다림을 견디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면 아마도 그때일 것이라고."

중경삼림 보고 나서 홍콩 감성에 취해 쓴 글이다. 치명적이고 다시 있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같은 말 여러번 할 필요 없이 문장들을 압축해서 썼기 때문에 긴 글은 되지 못했는데, 이 글 속 시스이와 이타치, 이타치와 사스케 관계처럼 짧고 굵은 단편이 완성되었다. 예전에 <킬링 소프틀리>를 쓸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가혹한 도시에서 가혹한 선택지를 골라 나아가는 이야기에 한동안 빠져있던 적이 있어서 익숙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외전은 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러나 누군가는 했어야 하는 이야기로 골라 쓰는데, 레퀴엠의 외전인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사실 본편보다 마음에 드는 글이다. 시아의 California Dreaming을 내내 들으며 썼다. 나 캘리포니아를 꿈꾸네 하는 가사와 홍콩섬의 조화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맨 마지막 문장이다. "악한의 사정을 이해한 순간부터 시스이는 나락에 떨어졌던 것이다." 이 문장을 가장 처음에 써놓고 시스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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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인 / 시스이타

"이타치는 아마도 어리석은 중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시스이를 잊지 못해 매년 이곳을 찾아 물소리를 듣고 향을 맡고 있으므로. 번뇌의 불꽃은 꺼질 줄을 모른다.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 그리고 흐르지 않는 물."

장마가 쏟아지던 여름밤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 빗소리를 듣다가 쓴 글이다. 이것도 중경삼림의 ost 제목인데, 꿈 속의 사람이라는 뜻의 夢中人 만큼 시스이를 대변하는 말도 없다는 생각에 착안했다. 5천 자 남짓한 짧은 글이지만 시스이에 대한 이타치의 감정을 전부 눌러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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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흐름 / 우시오이

"졸업은 오이카와 토오루에겐 고교배구의 끝을 의미했다. 한편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는, 짝사랑의 끝을 의미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점에, 두 가지 의미는 자연스럽게 혼재되었다."

여기서부터 하이큐. 처음으로 하이큐 애니 본 다음에 쓴 글이다. 입덕한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 쉽게 썼는데, 그만큼 우시오이의 관계성이 끝내준다는 뜻이겠지...ㅋㅋㅋ 2차창작은 원작에서 못 다 한 이야기를 쓰는 기분으로 쓰는데, 이만큼 이입하기 좋은 커플링을 만난 것도 운이라고 생각한다. 근 1년 넘도록 혼자서 소소하게 하는 덕질에도 지치던 차에 하이큐를 봤고, 우시오이에 꽂혀서 글도 쓰고 나니까 빼도 박도 못하게 입덕한 기분을 느꼈다. 우시오이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 중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원제는 <기류>로, 우시오이 사이에서 빚어진 미묘한 정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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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yes Wide Shut / 우시오이

"설령 불빛 한 점 없이 음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해도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믿어야 했다. 우린 세계의 끝으로부터 도망쳐온 최후의 아이들이었으므로."

오메가버스 디스토피아. 늘 좋아했던 이야기다. 꼭 다음 신간으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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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 / 우시오이

"순수한 감정 그 자체가 오이카와를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바라보게 하는 마음. 오이카와가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오이카와밖에 알아줄 수 없는 마음. 머리부터 함몰되어 익사할 것 같은, 그리하여 죽고 싶은 기분까지 드는 그 심정."

물에 빠져죽는다는 게 아니라, 모래에 빠진다는 뜻의 익사溺沙다. 여름에 너무 더워서, 이 더위를 아무것도 안 한 채 그냥 보낼 수 없다 싶어서 시작한 이야기다. 사막AU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여기에 꽂혔는지... 여름날씨 덕이었겠지. 사막을 배경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원없이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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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 우시오이

"그래서 우시지마는 그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믿기 시작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오이카와, 나의 토오루. 의심은 필요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분별을 초월한 존재다. 광대한 우주에 우시지마가 사랑해마지않는 단 한 사람이 존재했다. 바로 여기에, 이 낭만적인 달의 도시에."

슈만의 환상곡을 bgm삼아 계속 들었다. 달이 갖고있는 낭만성에 착안했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와 같은 칼리지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쓴 단락은 지금도 가끔 읽어본다. 오이카와를 향해 무한정 크기를 불리는 우시지마의 사랑이 아낌없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오이카와, 나의 토오루."하는 우시지마의 독백을 가장 좋아한다.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르테미스 신을 숭상하듯 오이카와를 숭상할 수밖에 없었던 우시지마의 이야기. 연인 오리온을 쏘아죽인 아르테미스 신화의 패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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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TIME SADNESS / 우시오이

"그리고 나는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너에게 고백하게 될 것이었다. 난 치열하게 너를 사랑했고, 내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영원히 불탈 것만 같은 여름이 이 안에 들어있어 앞으로도 치열하게 너를 사랑할 것이라고.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시스이타에서 우시오이로 커플링을 옮겨가면서 글 쓰는 방법을 바꿨다. 낭비되는 문장 없이 눌러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느슨한 문장들로 가볍게 즐기며 쓰자는 생각으로... 그러던 중 써머타임 새드니스는 다시 압축된 문장으로 돌아간 글이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미워한다." 이 문장으로 우시오이의 모든 사정이 설명되지만 어떻게 네 편으로 풀어봤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순정이 키워드였다. "모든 일엔 끝이 있어야 하고, 가는 길이 나 있어야 한다."는 문장은 자다가 꿈에서 생각한 문장인데, 왜 그런 걸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올해 여름이 끔찍하게 더웠던 덕분이다. 라나델레이의 Summertime Sadness를 들으며 착안하긴 했는데, 막상 한창 쓸 때에는 묵음 속에서 썼다. 진짜로 더운 한여름은 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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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에 관한 / 우시오이

"키스도 했던가? 섹스도 했던가? 두 번째 질문은 오이카와의 도발일 것이나, 두 사람의 과거는 기억하려 애쓴 다음에야 간신히 생각나는 그런 것이 되었다. 오이카와의 말이 옳았다. 그들에겐 증거가 없었다."

올해 덕질의 대미를 장식할 우시오이...ㅋㅋㅋ 우시오이로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를 우시지마와 오이카와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글을 쓰고 있는데, 난 일상물은 재미없어서 못 쓰겠다는 생각을 깨뜨린 계기였다. 우시오이면 물만 마시고 잠만 자도 재미있어... 원작에서부터 우시오이가 서로에 관해 해묵은 감정을 갖고있기 때문에, 그 기초에 충실해서 찬찬히 풀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글은 보통 완성된 것을 읽기 위해서 쓰는데, 한줄 한줄 쓰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글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감정을 한층씩 쌓아가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170페이지나 쓸 줄은 몰랐지... 우시지마의 시선에서 오이카와를 관찰하고, 우시지마가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이야기했다. 느린 호흡으로 섬세하게 묘사하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퇴고를 하다보니 정말 웬만한 연습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아무튼 원없이 우시오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유일하게 힘들었던 부분은 수위를 조절하는 거였다. 원제는 <증거>였다. 아델의 Chasing pavements, When we were young, 그리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주로 들으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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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관한 이야기

난 원하는 때 원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길게 말하는 걸 못하기 때문에 매번 글쓰기가 어렵다. 좋은 글감을 만나는 일 자체가 운이나 다름없다. 그런 면에서 시스이타와 우시오이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혼자 만족하는 글이 아닌 공감을 얻는 글을 썼다는 데서 성취감을 느꼈다. 그건 내년에도 우시오이로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연초부터 운수가 나빴다. 올해 상반기 같은 해는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 최악이었는데, 이런 와중 어떤 해보다 글을 많이 썼다. 시간 많고 평탄했지만 글은 거의 쓰지 못했던 작년과는 정반대로.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글쓰는 행위로 풀었던 것 같다. 특히 설국은 내가 매달리듯이 썼다. 연초부터 꾸준하게 달리면서는 작지 않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내년에도 얼마간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어떤 커리어도 되지 않는 취미지만 오로지 지금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써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쓸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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