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대학생 엘런x회사원 리바이로 평범한 일상물
딱 일 년 전에 쓰다가 만 글인데 제목 급조해서 업로드!!
“어디 가는지 말 안 해줄 거예요?”
“산.”
장장 일주일간의 냉전 끝에 결국 말문을 여는 쪽은 나였다. 나는 그의 차에 올라서도 두 시간 가까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마침내 정적을 깨트리기로 마음먹었다. 도무지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던 것이다. 먼저 말을 걸지 말지 내가 두 시간씩이나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리바이는 너무나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런 그가 얄미워서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폈다. 굳게 낀 팔짱은 풀지 않았다. 우리가 탄 차는 이미 산간지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누가 산에 간다는 거 모르나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우리는 일주일 전 말다툼을 했다. 내 편은 들어주지 않고 상황을 조목조목 짚는 그에게 화가 났다. 홧김에 나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에게서 횅하니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진짜로 일주일동안 그는 연락 하나 하지 않았다. 전화는 물론이거니와 문자메시지 하나도 보내지를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어떻겠는가. 더 서운할 수밖에 없다. 애인이 마음 상하면 좀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애인이 아닐 텐데 말이다. 리바이는 연락하지 말라는 말만을 아주 곧이곧대로 들어주었다. 일주일간 잠수를 타고 있다가 그는 몇 시간 전 우리 집 앞에 대뜸 나타났다. ‘집 앞에 와 있으니 외투 가지고 나오라’는 짤막한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과연 집 밖에는 그의 지프가 와 있었고, 나는 거기에 올라 침묵만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인사도 안 했다. 먼저 말을 거는 쪽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리바이의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식었던 화가 다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일주일동안 아주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정작 본인은 멀쩡한 것 같아서.
“누가 산에 간다는 거 몰라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다 왔어. 조금 더 가면 돼.”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도착지점이 수 마일 이내로 나타났던 것이다. 도무지 대화가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나는 어디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버렸다. 우리는 국도를 타고 한참을 달렸고, 어느덧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 들어서 있었다. 쭉 뻗은 능선을 보건대 모르긴 몰라도 산맥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느닷없이 이렇게 먼 곳으로 여행이라니 별로 즐겁지도 않았다. 한없이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도로의 아스팔트 구경만 하는 것은 여행도 아니다. 그나마 단풍이 든 모습이 보이고 있어서 기분이 더 우울해지지는 않았다.
남자 둘이 퍽퍽하기 그지없는 여행을 떠나 산으로 접어든다. 우습게도 나는 아주 예전에 본 영화를 떠올렸다. 브로크백 마운틴. 자세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섹스 씬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내가 훗날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남자 애인을 사귄다는 점에 있어서 말이다. 최소한 나는 리바이와 내가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첫경험을 치르지는 않길 바랐다. 어떤 준비도 없이 얄팍한 텐트 안에서 붙어먹는 것. 심지어 그들은 샤워를 하지도 않은 채 그 짓을 했다. 전혀 아늑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은 공간에서 그 짓이라면 백 번 사양이다. 벌써부터 웬 걱정이냐고 해도, 생각이 그런 쪽으로 튀어나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뭐 지금 기류로 봐서는 첫경험은커녕 말이나 제대로 나눌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일주일 전 싸움의 연장전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리바이는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전방에 집중했다.
어느덧 우리는 어느 산 속에 들어서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참 별 일도 다 있다. 리바이 본인이 나서서 이런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올 줄은 몰랐다. 볼 것이라곤 나무밖에 없는 곳이었다. 누가 이런 곳에 길을 닦아놓았을까 싶을 만큼 온통 숲이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빛줄기의 형체가 드러나는 곳. 리바이는 어느 순간 샛길을 타더니, 비포장도로(거길 도로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로 접어들었다. 차는 몹시 덜컹거렸고 나는 이러다 천 길 낭떠러지가 불쑥 나타나 차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좀 겁이 났다. 아무래도 나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우리는 산 속 아주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리바이의 차가 지프인 것이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나는 차창 옆에 달린 손잡이를 꽉 쥐었다. 뒤를 돌아보니 벌써 아스팔트길은 보이지도 않았다. 길은 제대로 알고 가는 것인지 슬슬 걱정이 되어 리바이를 봤는데 뜻밖에 그는 여전히 여유작작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약간 흥분해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스타일이었나? 사실 굉장한 오프로드 마니아였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리바이는 대충 나무가 없는 공터에 차를 멈춰 세웠다. 시동이 멈추고 나서야 나는 우리의 차가 어찌나 덜컹거렸는지를 깨달았다. 지면은 엄청나게 평탄했다. 나는 두 번 망설일 것 없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바싹 마른 낙엽의 쌉싸래한 냄새와 촉촉한 공기가 뒤섞인 냄새가 가득히 들어왔다. 그야말로 가을숲의 냄새. 기지개를 쭉 켜자 믿을 수 없이 상쾌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발밑은 낙엽이 두텁게 쌓여 있어서 아주 푹신했다. 나는 집을 나설 때 아무 생각도 없이 워커를 신고 나왔지만 그건 아주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신발에 낙엽부스러기나 벌레가 들어올 걱정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리바이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 쪽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이런 델 온 거예요?”
약간 들뜬 나는 우리가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서 다시 말을 걸었다. 직후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것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서 얼른 트렁크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그리고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리바이의 트렁크에는 온갖 물건이 들어차 있던 것이다. 사람 하나 담을 수 있을법한 사이즈의 검은 가방 두 개와, 작은 가방이 또 두 개, 그리고 무언가 잔뜩 든 것 같은 종이 박스가 세 개. 심지어는 생수 한 다발과 장작이 분명한 나무도 한 아름 실려 있었다.
“다 밖으로 날라. 텐트 칠거야.”
리바이는 가방 하나를 내 품에 턱 안겨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안아들었고, 그 때부터 우리는 한동안 예정에 없는 노동을 좀 해야 했다. 아니 이것도 나에게만 뜬금없고 리바이에겐 다 예정되어 있던 일이겠지. 리바이는 아예 캠핑할 작정을 하고 텐트부터 해서 각종 식기도구와 음식을 챙겨온 것이다. 그런 게 다 어디서 났는지. 철저히 도회지 남자인 줄로만 알았다. 품이 넉넉한 바람막이 외투와 워커, 먼지 묻은 장비, 맥가이버칼 같은 것이 그와 어울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텐트의 뼈대를 세울 때 리바이는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게 아니지!” “너 눈 뒀다 어디다 쓰냐?” “을른아(이를 꽉 깨물어 발음이 뭉개졌지만 엘런아, 하고 부르는 소리다), 그 구멍으로 끼운 다음에는 어느 구멍에 끼워야 할까? 상식적으로, 응?” 하는 식으로 말이다. 구박에 가까운 잔소리에도 어쩐지 나는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그냥 네, 네 하면서 고분고분 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숲으로 놀러와 있었고, 무엇보다도 리바이의 표정이 즐거워보였기 때문에. 그가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싱글벙글한 것은 절대 아니다. 거의 짐짝이나 다름없는 일꾼을 부려먹느라 인상을 쓰면서도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캠핑이라곤 보이스카우트 시절 몇 번 했던 게 전부지만, 우리의 야영장은 꽤 그럴싸한 것 같았다. 삼각형의 인디언 텐트는 아주 번듯했다. 겉보기에 크기가 작아 걱정했는데 텐트 안으로 들어가니 발 뻗고 편히 누울 수도 있었다. 낙엽이 두텁게 쌓인 덕분에 지면이 푹신하기도 하거니와 리바이가 두툼한 스펀지 매트를 깔았던 것이다. 잠깐 누워서 싱싱한 공기를 들이켜고 있자니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텐트 앞에는 푸른 천으로 된 간이 의자를 세 개쯤 놓고 화로를 하나 놓았다. 화로라고 해 봤자 키가 작고 지름이 넓은 강철 깡통이었다. 어디서 그런 걸 구해왔는지. 무슨 건설현장에서 주워온 것 같았다. 아무튼 거기에 준비해온 장작을 던져놓고서(근처 나무를 베면 되지 않느냐는 내 말에 그는 이 나라에는 산림보호법이란 게 있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막대기를 가느다란 나무판자에 마찰시켜 불을 지피는, 다소 원시적인 방법을 기대했던 나는 좀 실망했다. 리바이는 내가 부싯돌을 구해오면 그래도 한 번 재고해 주겠다고 했다. 장작에 불이 붙자 캠핑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불의 훈기는 아주 강해서 그 앞에 가까이 있을 수 없었다. 리바이는 화로 위에 다리가 달린 그릴을 놓고 코펠에다 생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시냇물이 아닌 게 좀 아쉬웠다. 텐트를 치고 불까지 피웠지만 캠핑 준비는 끝이 아니었다. 리바이는 나한테 음식이 든 박스와 식기를 불가에 끌어다놓는 일, 차에서 침낭을 꺼내 텐트 안에 펴 놓는 일, 화로 주위에 낙엽을 걷어내고 물을 뿌려두는 일, 투박하기 그지없는 작은 조리대를 설치하는 일 등을 시키는 데에 몹시 바빴다. 더는 시킬 일이 없는지 마침내 그는 박스에서 베이글 봉지와 크림치즈와 플라스틱 스푼을 꺼냈다.
“이게 다 뭐예요? 이런 취미가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 자주 이렇게 놀러 다녔거든. 여기도 전에 와 본 곳이야.”
“몰랐어요.”
대충 대꾸하며 리바이는 맥가이버 칼로 베이글을 반으로 갈라 스푼으로 크림치즈를 쓱쓱 발랐다. 리바이는 내게 크림을 양껏 바른 베이글을 한 쪽 건네주고서 스테인리스 컵에다 커피가루를 덜었다. 그리고 화로의 코펠에서 뜨거운 물을 옮겨 담았다. 그는 커피를 한 잔 더 타서 한 잔은 내게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오늘 이른 아침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스턴트커피지만 향은 달짝지근해서 좋았다. 내가 코를 좀 훌쩍여가면서 빵을 먹는 동안 리바이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너 좀 궁상맞아 보인다, 하는 그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배가 고픈데 빵이 맛있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어머니랑은 화해했냐?”
한참 커피만 들이키던 리바이가 말했다. 나는 한 입 남은 빵을 우적우적 씹어 넘긴 참이었다. 거의 식은 커피는 쭉 마셔버렸다. 이제 본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뜬금없이 이런 곳으로 여행을 올 리가 없다. 나와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곧 몇 시간 전 도시에서의 기분으로 추락하는 게 느껴졌다. 한숨이 푹 나왔다.
“화해는 뭘요. 그냥... 그렇죠 뭐.”
“말 똑똑하게 해.”
“솔직히 나는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잘못한 건 오히려 엄마 쪽인데...”
“재혼이 잘못은 아니잖냐.”
“아 그래요, 잘못은 아니죠. 하지만... 배신감이랄까...”
“잘못은 스무 살씩이나 먹고서도 애처럼 구는 네가 잘못이지. 난 그렇게 생각해.”
리바이는 나를 힐끔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인상을 쓰며 정수리를 긁어서 헤집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요. 우리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일 년 만에 재혼을 하려 한다는 게 문제였고, 리바이는 현상을 냉정하게 따지고 드는 것이 문제였다. 그 문제들은 나를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리바이의 태도는 차치해두고, 나는 그간 엄마와 재혼 문제로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이혼했다. 그것만도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부모님은 큰 싸움도 없이 이혼절차를 착착 밟아나갔다. 마치 내가 성인이 되는 순간만을 바라보며 참고 살아왔다는 듯이. 집안의 어딘가에서, 내가 없는 곳에서 수없이 다툼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지독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나는 우리 집이 아주 화목한 가정인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으레 그럴 것이라고 철저히 믿어온 세계는 완벽한 허상이었다. 부모님 중 한 분에게 애인이 생긴 것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소한 성격 차이는 이십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합당한 이혼 사유로까지 변질했다. 결국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이십여 년 간 믿었던 세계는 박살났고, 파국을 맞았다. 과부와 홀아비 중에서 누가 더 가여운지 나는 한동안 저울질을 해야 했다. 결국 나는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때마침 아빠는 직장을 새로 발령받으면서 대륙을 가로질러 나라 반대편으로 갔다. 그게 겨우 일 년 전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도 때는 왔고 집안은 알아서 조각났다.
그리고 이제 좀 정신 추스르나 싶었는데 엄마는 재혼을 한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배신감. 내 충격을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엄마는 또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아무튼 이건 거의 음모 수준이었다. 이혼과 마찬가지로 전조가 없던 일이었으니까. 엄마는 어느 날 내게 애인이 있으니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내가 순순히 들어먹을 리가 있나. 그래서 나는 엄마랑 대판 싸웠고, 집을 나와 리바이를 만나서 하소연을 했다가, 리바이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바람에 또 홧김에 그와 싸웠다. 그게 바로 일주일 전 일이었다. 뭐, 그 다음부터는. 리바이와는 냉전이고 엄마와는 매일같이 싸움을 거듭했다. 내가 무슨 군인도 아니고, 내 잘못 아닌 일로 계속 싸워야 하는 건 몹시 짜증났다. 일련의 장면들을 책장 넘기듯 휘리릭 떠올리며 나는 불길을 노려보았다.
“미안하네요, 애처럼 굴어서.”
“알면 됐어.”
“......”
“그래서, 어머니랑 화해는 해야 할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그건 엄마를 인정한단 뜻이잖아요.”
“그러면 지금은 어머니를 인정 못하겠다는 말이네?”
“따지면 그렇죠.”
“너 참 못났다.”
“아니 그렇잖아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혼하고, 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재혼한다는데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어른스러운 거예요?”
“가만히 있다가 재혼? 아닐걸. 사인 같은 건 언제나 있었을 거야. 네가 둔해서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지. 잘 생각해 봐.”
리바이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박스를 뒤져 날고기 한 팩과 채소를 한 무더기 꺼내왔다. 그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것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태평한 표정으로 채소의 껍질을 벗기고 도막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의 야무진 칼질로 당근과 감자가 한 입 크기로 동강났다. 비닐장갑을 끼고(나는 그의 준비성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닭으로 보이는 고기를 도막내 팬에 올려두었다.
리바이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작년에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 내가 어느 부분에서 막히면 그는 언제나 내가 혼자 고민할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그 교육방침의 효과는 상당했다. 그는 부업삼아 과외를 하는 주제에 내 성적을 참 많이도 끌어올렸고, 우리는 함께 있을 시간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었기도 하고 말이다. 지금은 꼭 과외 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고 리바이는 옆집 사는 선생님이던 시절. 나는 어떤 문제에 직면해서 해법을 찾아 헤매고, 리바이는 나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둔다. 울타리처럼 둘러쳐진 키 큰 나무들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산 속은 해가 빨리 진다더니 벌써 먼 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리바이는 이제 새 코펠을 올려 버터칠을 했다. 장작의 화력이 세서 코펠은 금방 달궈졌다. 치익 하고 버터 타는 냄새가 고소하게 피어났다. 리바이는 거기에 손질한 채소를 투하해서 달달 볶았다. 소금간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뒀던 뜨거운 물을 부었다. 우유와 닭고기까지 넣고 나자 훌륭한 치킨스튜의 모양새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들어 엄마가 늦게 들어오곤 했어요. 일 끝나면 6시인데 9시 넘어서 오고 그랬으니까.”
“그래. 그런 걸 사인, 또는 낌새라고 한단다.”
“뭐 하다 오냐고 물어보니까 데이트 하고 왔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난 그게 진짜 데이트를 의미하는지는 몰랐죠. 그냥 엄마 친구랑 놀다 오는 줄 알았어요. 알레르토 아주머니라든가...”
“......너 바보냐?”
“뭐, 옷차림도 좀 화려해지긴 했어요. 안 입던 치마를 입었으니까. 화장도 하고...”
“미안하다. 너 등신이지?”
“근데 그게 다 남자 만나려고 꾸민 거였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냔 말이에요. 남자를 만나면 만난다고 제대로 얘기했어야지.”
“내 보기에 어머니는 그만하면 충분히 말씀하신 것 같다. 네가 좀 모자라서 못 알아먹은 거지.”
“자꾸 모자라다고 하지 마세요.”
“알았어.”
“진짜, 진짜 백 번 양보해서 엄마한테 남자가 있는 건 그렇다 쳐요. 근데 결혼이 달린 문제잖아요. 우리 엄마가 애 딸린 아저씨랑 재혼한다는 게 말이나 돼요?!”
나는 말하다 말고 무릎을 꽝 내리쳤다. 물론 내 무릎만 아팠다. 리바이는 천천히 스튜를 휘저었다.
“새 사람을 만날 거면 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든가. 빌딩 한 채쯤 가지고 있거나, 나이가 좀 젊거나. 애 딸린 이혼남은 진짜 아니잖아요. 그 집 애가 글쎄 나랑 동갑이래요!”
“...너 뭐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희 어머니도 애 딸린 이혼녀시다.”
리바이는 손을 멈추면서까지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순간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너희 어머니도 애 딸린 이혼녀시다. 그 말은 잔인하지만 지극히 사실이었기에. 어쩐지 나는 리바이의 얼굴에서 다음에 나올 말을 읽을 수가 있었다. 애도 그냥 애냐? 멀대같은 놈이 눈치도 없고, 생떼밖에 못 써, 갓 대학 들어가 돈 먹는 기계야. 근데 밥은 많이도 먹고, 거기다...
“그 집도 너 같은 짐짝 달고 있다냐?”
얘기가 다르죠. 우리 집은 우리 집이고 그쪽 집은 그쪽 집이죠. 하고 나오려던 말은 슬그머니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리바이는 끓고 있는 스튜를 무심히 휘저었다. 그 와중에도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라 허기를 자극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옥수수를 몇 알 꺼내 버터를 발라 그릴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나를 시켜 예의 그 박스에서 소시지를 꺼내오게 했다.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마법의 박스였다. 리바이는 맥가이버칼로 소시지에 칼집을 내어 옥수수 옆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음식이 익어가는 양을 지켜보며 다리를 쭉 뻗었다.
“바꿔 물어보자. 너희 어머니가 애 딸린 이혼남 만나는 건 안 괜찮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나 같은 아저씨 만나는 건 괜찮냐?”
“그건...”
“괜찮겠지. 그래서 네가 어린애라는 거야. 너 애초에 어머닐 좋아해서 어머니 쪽에 남은 거 아니었냐?”
“엄마는...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아서...”
“놀고 있네. 어머니를 돌본다는 놈이 그러냐?”
“......”
“어머니가 널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어머니를 필요로 했을걸. 왜냐면 너는 어린애니까.”
쏟아지는 공세에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좀 돌려 말할 수도 있는 것을 그는 언제나 직구로 퍼붓는다. 물론 돌려 말하면 내가 못 알아듣겠지만. 어쨌건 한 가지는 인정해야 했다. 그는 틀린 말은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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