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런리바_전력_비
*'무지개 걸린 기슭으로 가자'라는 가사를 듣다가, 그리고 언젠가 썼던 글에서 일부 잘라내어 씀
비는 며칠간 쉼 없이 내렸다. 그날처럼 비가 많이 오던 언젠가가 있었다.
그 언젠가에 엘런은 불쑥 물었다.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궂은 하늘을 바라보던 엘런의 표정을 리바이는 기억한다. 리바이는 엘런의 옆얼굴을 쳐다보다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물이 붇고 익사하겠지. 그러나 엘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질문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의 서두였다. 엘런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비가 백 년이나 그치지 않는 땅이 있대요. 사실 그건 땅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워낙 작은 섬이라서.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땅을 말하는 거예요. 강이나 바다같이 깊은 물 위에 둥둥 떠 있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아무튼. 거기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말하길 비는 한 번 내리면 백 년을 그치지 않고 내린대요. 그래도 익사할 걱정은 없을걸요. 비는 그 땅을 둘러싼 물로 흘러들 테니까요. 오히려 비 덕분에 그 땅은 계속 떠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리바이는 한참 듣다가 물었다. 그래서는요. 얘기는 그게 끝인데요. 싱거워... 리바이는 재미없어 했다. 그러나 엘런은 좀 답답해했다. 느끼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백 년이나 비가 내린다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 흐르는 불이나 얼음의 대지같이, 비가 그치지 않는 땅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축축할 것 같아. 난 축축한 건 싫어. 춥고 기분이 나쁘거든. 그쯤에 이르러서 엘런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 됐어요. 모르면 말아요. 하고 다시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가보고 싶다는 중얼거림과 함께.
그리고 말은 씨가 된다. 머잖아 엘런은 그곳에 갈 수 있게 됐다. 벽은 건재하고 리바이는 여전히 투쟁한다. 그럼에도 엘런이 벽을 넘어 그곳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제 리바이는 혼자다. 비 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리바이는 혼자다. 주인공도 사건도 없는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이제는 없다. 아주 멀리 가버렸기 때문이다. 리바이는 엘런이 했던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비가 그치지 않는 땅에 대한 이야기를. 그것은 엘런이 남긴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것엔 공백이 너무 많아서 리바이의 추측과 이해로 채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비가 내리는 땅을 그려본다. 그곳에 엘런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작은 땅에 엘런이 덩그마니 서 있는 것이다. 그치지 않는 비를 맞으며. 엘런은 아주 처량해 보일 것이다. 리바이는 우산을 씌워주거나, 우산이 안 된다면 망토라도 둘러주고 싶을 것이다. 망토마저 없으면 자신의 손바닥이라도 드리워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커다란 눈을 찡그리게 하는 빗방울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땅엔 엘런밖에 없다. 엘런은 혼자서 비를 맞고 있는 수밖에 없다. 백 년이나 이어진 비는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보지만 그 땅에 엘런을 도울 사람은 없다. 리바이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단지 의욕한다 하여 발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바이는 어쩐지 엘런의 뒷모습밖에는 그려볼 수 없다. 엘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그래 그곳에 가니 좋더냐, 묻고 싶지만 차마 물을 수 없다. 엘런이 마침내 그곳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꼴이 될까봐.
어쩌면 소리 내어 울고 있을 엘런이 걱정된다. 그러나 엘런에게서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엘런이 떠나면서, 엘런과 리바이 사이엔 어마어마한 간극이 생기고 말았다. 단순한 의지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다. 그래, 이제 그만 인정하자, 그곳은 말하자면 피안이다. 그 땅은 저승에 대한 비유이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백 년이나 비가 그치지 않는 곳이라니, 그런 곳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리바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러했다.
그것은 지하에서부터 들어온 전설이다. 그 이야기가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서 떠드는 녀석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꿈같은 이야기를 하며 들뜨는 엘런이 보기 좋아서, 리바이는 그저 엘런이 말하도록 놔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을까, 엘런은 정말로 그곳에 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때 리바이는 엘런의 입을 막아야 하지 않았을까. 엘런이 그런 이야기에 관심 갖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재앙의 잔뿌리라도 뽑는 것이 리바이의 소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리바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엘런은 보란 듯이 죽었다. 그렇다면 엘런의 죽음엔 리바이의 탓도 섞여 있는 것이다. 얼마간이라도 말이다. 리바이는 엘런의 죽음에 보탠 것이 있다. 지금 엘런은 우중충한 땅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을 수 없어졌다. 리바이는 비가 내리는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며칠을 내린 비는 기세가 꺾일 줄을 몰랐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처럼 하염없이 쏟아졌다. 리바이는 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재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의 근원이 머리 위에 있었다. 리바이는 그곳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었다. 엘런이 말했던 땅이 바로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선 다 내려놓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추측으로만 이어지는 생각이 서러웠다. 빗방울이 온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눈을 뜰 수 없었다. 깎이고 깎여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었다. 그래도 리바이는 눈을 떴다. 그의 힘으론 닿을 수 없는 그곳을 노려보았다. 여느 때라면 엘런이 그를 끌어안아주었을 것이다. 춥지 않도록 입을 맞춰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바이는 자신의 양 팔을 끌어안았다. 그를 끌어안아줄 사람이 없기에 스스로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세 온몸이 비에 절어 있었다. 생명까지 적시는 비였다. 얼마간이라도 리바이는 엘런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리바이는 그곳에 주저앉고 만다. 고개가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죽도록 울고 싶어졌다.
#엘런리바 전력_집착
-사실은 당신이 날 떠날까 두려워요.
아주 오랫동안 혼자서 속을 끓인 끝에 엘런은 솔직히 고백했다. 리바이 앞에서 그 짧은 문장을 발음하기 위하여 엘런은 수십 번쯤 연습했다. 그것을 말하는 데엔 몇 초 걸리지도 않았지만, 그 짧은 문장을 발음하는 동안 엘런은 리바이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목소리는 낸다 해도 얼굴 표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해놓고 엘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 손의 손거스러미를 쥐어뜯었다. 쥐어뜯는 손가락이 떨리기에, 엘런은 그냥 손가락끼리 깍지 꼈다. 이상한 일이다. 이쯤이면 리바이가 무어라 답해 주어야 하는데.
-뭐야...
엘런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들었다. 리바이의 입 부근에서 한 번 멈추었다가, 두 차례에 나누어 가까스로 눈을 마주쳤다. 뜻밖에 리바이는 바람 빠진 표정이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
별 싱거운 녀석을 보겠다는 태도였다. 좀 과장하자면 엘런의 고백을 우습게 여기는 듯한 그였다. 뭐랄까, 엘런은 순식간에 피가 식었다. 사실 나는 너를 증오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처음 리바이에게 당신이 좋다고 고백했을 때보다도 수백 배는 되는 용기를 끌어올린 다음 간신히 말한 진심을, 리바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냐고요? 그런 것? 그런 게 뭔데요? 내가 그런 말을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죠? 내 말 이해한 것 맞아요? 그 말을 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노여움 섞인 마음이 엘런 안에서 어지럽게 진탕을 쳤다.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화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다.
-죽을 것 같은데요, 나는.
엘런은 반항하듯 말했다. 내장이 꼬이도록 긴장했다 삽시간에 싸늘해진 엘런이 한 마디 내뱉는 동안 리바이는 팔짱을 끼고 턱을 좀 높이 들 뿐이었다. 엘런으로선 리바이가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엘런은 당장 리바이 몸 아무 곳이나 움켜쥐고 인형처럼 뒤흔들고 싶은 충동 앞에 서 있는데 말이다.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리바이는 헛소리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엘런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그랬구나, 그 한 마디만 바랐을 뿐인데 오히려 리바이는 엘런의 화를 부추겼다. 정말로 죽을 것 같이 두려워서 그 두려움을 말했다. 그러나 엘런이 각오한 죽음을 리바이는 함부로, 라 치부했다. 리바이는 엘런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악스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엘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막았다.
-딱 죽고 싶을 만큼 두려웠어요. 당신이 떠날까봐. 나는 항상 그게 두려웠어요. 그런데 항상 말은 못하고. 혼자서만 무서워했어요. 나는 정말이지... 정말 큰 맘 먹고 이야기한 건데...
손가락 사이로 두서없는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었잖아.
-죽을 만큼이었는데요!
그러자 리바이는 엘런의 가슴을 꾹 찔렀다.
-그런데 안 죽었잖아. 네 두려움은 겨우 그 정도였다는 거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아냐.
여전히 동요 없는 얼굴로 리바이는 술술 잘만 말했다. 엘런이 뭘 몰라서, 제 자신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엘런은 잠시 눈을 감고 파르르 떨리는 숨을 삼켰다. 한 마디, 한 마디만 더 했더라면 당장 리바이의 목을 졸랐을지도 모른다.
-왜 이해를 못해요? 나는 언제나 두려워했단 말이에요. 내게 해줄 말이 그런 것밖에 없어요?
마지막 남은 자제력을 쥐어짜 엘런은 말했다. 말은 어찌나 떨려 나왔는지 엘런 본인도 아주 엉망이라 생각들 정도였다.
-그래, 그래, 내가 다 미안하다. 됐냐?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끝이었다.
* * *
리바이가 짜증난다는 듯 뒤돌아서 걸어가던 모습을 엘런은 황망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점처럼 작아지던 모습을 엘런은 전부 기억한다. 그 순간마저 도무지 납득되지 않음이 끔찍했다. 화를 낼 사람은 나인데 왜 당신이 화를 내는 거지? 엘런은 소리 없이 온몸을 떨었다. 용기를 내었음에도 관계는 진척된 것이 없었고, 결국 엘런은 그들의 끝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엔 높다란 벽이 있었으며,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끝이란 벼랑 끝에 몰린 것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나 느끼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것이 그들의 끝이라 생각했다. 분명히. 그러나 엘런 스스로도 자신이 불가해했다. 이상한 일이다. 우린 여기서 끝이에요, 하고 선포한 쪽은 자신인데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엘런은 여전히 리바이를 이해할 수 없다. 엘런의 두려움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어쩌면 전보다 더 두려운 것 같다. 엘런은 그래도 리바이가 보고 싶다. 매일 리바이를 생각한다. 아니 사실은 그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하나도 없다. 손톱은 다 찢어져서 물어뜯을 것도 없고 리바이를 제외하면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 일상은 무너졌다. 파탄난 관계는 어떻게 되돌릴 수 있나?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더라? 엘런이 서서히 미치고 있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태어난 무언가는 자꾸만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엘런은 두려웠다.
#엘런리바 전력_메이드
*'무덤에서 요람까지'에 넣으려 했던 내용
A Shot to Remember
런던 시내 한복판에 어째서 검은 연기가 솟아나고 있는가.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이상스런 불안감이 엄습했다. 화재의 당사자가 내 저택이 아니기만을 바랐지만 저택으로 향할수록 불과 가까워지는 느낌인 것이다. 공기는 차츰 매캐해졌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비명 섞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그 수많은 집들을 제치고 불타도록 선택된 집은 그 무슨 기구한 팔자인가. 그러나 초조했다. 내 저택일 거란 확신은 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초조했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화재의 당사자일 가능성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손에 든 선물상자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더욱 꽉 잡는다. 가죽장갑과 비닐 포장이 마찰하며 짧은 굉음을 냈다. 발이 급해졌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화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 직감은 마침내 결과를 목도하곤 촛불 꺼지듯 사그라든다. 내 저택이 있어야 할 그곳에 화마가 있었다. 백여 년간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저택이었다.
저택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불이었다. 불은 저택 안에서 발생했는지 저택 바깥에서 발생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야말로 온 저택이 활활 타고 있는 것이다. 불이 시야를 가득 메울 때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하며, 언제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입을 다문다. 그러나 곧 다시 벌어졌다. “예거 씨, 이것 참 유감이라고도 할 수 없고, 거 참... 정말...” 좀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나를 아는 사람이 말을 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다. 왜냐면 내 저택이 지금 활활 타고 있지 않은가. 감히 싸워볼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적을 마주한 인간은 마치 홀린 듯이 그것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초적인 공포에 압도되는 동시에 매혹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지? 다시 생각하는데 좀 전의 목소리가 말했다. “...지켜봤는데, 안에서 사람은 안 나오는 것...” 거기까지만 듣고 나는 귀를 닫아버렸다. 잠시 눈을 감고 파르르 떨리는 숨을 갈무리했다. 기침이 나올 만큼 독한 연기 때문에 심호흡은 할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뜬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릿속을 더듬어본다.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불을 끄지 못했나? 어쩌면 불은 처음부터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컸을지도 모른다. 집안에 아무도 없었나? 그렇지, 아침에 하인들을 모두 휴가 보낸 참이다. 내가 어떻게 타이밍 좋게 그들에게 휴가를 주었나? 바로 메이드의 제안 때문이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집사와 하인들은 내보내고, 빈 저택에서 우리만의 휴가를 보내자고 말했던 그가 아닌가. 오늘은 재미난 쇼를 준비해둘 테니 일찍 들어오라던 리바이의 말이 생각났다. 아침에 그가 그렇게 말하며 메이드복의 허리끈을 묶던 장면까지도 생생히 기억한다. 나의 메이드가 나를 위하여 무언가 일을 꾸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말한 쇼가 바로 이런 것이었나? 이건 상식을 뛰어넘는 장난이었다. 세상에 이런 것을 쇼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순 없다. 내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리바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엘런, 우린 미친 인간들이야. 난 내가 미쳤다는 걸 인정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지.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차이야...’ 두꺼운 책에서 눈을 떼고 그렇게 말하던 그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리바이는 그런 말을 곧잘 했지만 나는 그의 입을 막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던가. 그가 너무도 정신 박힌 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그의 허리끈을 더욱 죄었다. 하얗고 푸른 천으로 그를 감싸고, 발목을 죄는 부츠를 신기고, 우리의 저택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그를 철저히 나를 위한 메이드로 만들었다. 그는 나의 메이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택은 불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이 쇼였다는 말인가? 그쯤 되어 리바이가 말했던 쇼란 과연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다. 메이드 놀이를 말하는 것인지 불타는 저택을 말하는 것인지.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일 층이 허물어졌다. 저택이 주저앉는 모습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보였다. 내부에서 천장 장식이 떨어지는 모습과 가구가 쓰러지는 모습이 낱낱이 보였다. 그때 옆에서 나를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팔이 있어서 보니 낯선 이가 있었다. 제발, 원치 않는 순간에 기어이 방해하고 마는 낯선 이들이라면 이제 치가 떨렸다. 나는 내게 무어라 소리치는 그를 홱 밀쳐버렸다. 그는 길바닥에 나자빠졌고 이번엔 사람들이 그 사람 주위로 몰려들어 소란을 피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일이 중요했다. 다시 무너져가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나의 책도, 수집품과 돈도, 리바이의 메이드복과 그의 얼마간의 소지품도 형체를 잃어가는 모습.
저택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내 눈 앞에서 과거가 소실되었다. 불은 현재와 미래까지도 태워 없앤 셈이었다. 저택의 주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죽음만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나의 무덤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 끝이라는 생각밖에는.
리바이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뭐가 되든 좋으니 설명을 좀 해 달라고 해야 했다. 어쩌면 나는 그의 부츠 아래 무릎 꿇고 비는 일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나는 기꺼이 그럴 수도 있었다. 제발 이것이 아주 지독한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리바이를 찾자. 그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마지막까지 꼿꼿하게 서서 불과 씨름하던 벽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거긴 응접실이 있던 곳이었다. 손님이 없을 때 리바이와 티타임을 가지곤 했던. 나는 무덤에서 눈을 떼고 바닥에 떨어뜨린 선물상자를 집어 들었다. 돌아보니 사람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시선들엔 지긋지긋하게 질려버렸다. 리바이가 어디로 갔는지, 그는 나에게 힌트를 준 적 없지만 답을 알 것 같았다. 독서광에 가까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세계의 서술 어쩌고 하는 책이었다. 그가 읽는 책들은 죄다 그런 제목들이었다. 카르피니 기행기. 대초원을 찾아서. 그것으로 보아 리바이는 만약 기회가 된다면 훌쩍 떠나버릴 사람임이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었고 단지 필사적으로 무시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리바이에겐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장 항구로 가기로 한다. 거기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왕복하는 커다란 상선이 즐비했으므로, 리바이는 그 중에서 아무 배나 골라 타도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 지금쯤 그는 배를 고르며 즐거워하고 있을까. 이미 배에 타서 멀어지는 영국을 바라보고 있을까. 우선은 마차를 잡아타기 위하여 걷기 시작한다. 나의 메이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엘런리바 전력_역키잡
*어린신랑 배경으로
여름숲은 그야말로 변덕쟁이였다. 아침에 집을 나왔을 땐 분명 날이 맑게 개었는데, 정오쯤 되니 머리 위에 먹구름이 고여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공기가 축축해지는 것은 단지 그들이 깊은 숲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비의 징후였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소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난 다음이었다.
어떻게 피해볼 겨를도 없이 하늘은 비를 마구 쏟아냈다. 갑작스런 장대비는 줄기가 굵기도 해서, 그들이 아차 하고 놀랄 틈도 없이 옷을 적셨다. “비 온다!” 가까운 곳에서 리바이가 소리쳤다. 멀리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사냥감은 그 소리를 듣고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비가 쏟아졌지만, 리바이가 소리치기 직전까지도 사냥감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던 엘런은 허탈한 신음소리를 냈다. 화살만 쏘면 바로 잡을 수 있는 놈이었는데. 엘런의 화살 대신 아쉬운 눈이 사냥감의 뒤를 좇았다. “뭘 하는 거야? 이리 와!” 다시 리바이가 소리쳤다. 엘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냥감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리바이가 있는 방향을 향하여 뛰었다.
더 어릴 때부터 돌아다닌 숲이었으므로 그들은 비가 쏟아져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을 향하여 곧장 달렸다. 뛰어도 뛰지 않아도 어차피 맞을 비인데 이렇게 죽어라고 뛸 필요가 있을까? 엘런은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리바이를 따라 달렸다. 숲에 비손님이 불쑥 찾아올 때면 리바이는 언제나 그렇게 했던 것이다. 벌써 어깨까지 푹 젖었지만, 비를 뚫고 싱그러운 풀냄새를 가로지르는 기분은 상쾌했다. 얼굴에 튀는 물방을도 기꺼웠다. 곧 그들의 목표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너나할 것 없이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러다 리바이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무릎을 짚고 숨 쉬었다. 엘런은 화살통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활을 살폈다. 마구 달리느라 도중에 잎사귀나 나뭇가지 같은 것에 걸려서 활이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된 것이다. 열두 살 생일 때 리바이가 엘런에게 선물한 것이므로, 엘런에겐 소중한 보물이었다. 다행히 활은 멀쩡했다. “아까는 거의 다 잡은 거였는데. 엄청나게 큰 사슴이었단 말이에요.” 엘런은 볼멘소리를 했다. 리바이는 허리를 펴고 엘런을 올려다보았다. “사슴이 아니라 노루겠지. 그렇게 큰 놈도 아닌데다 뿔도 없었거든.” “아니에요. 제가 장담하는데 그건 살찐 암사슴이었어요.” 그들은 사냥 내기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사슴인가 노루인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리바이는 그러나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턱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훔쳤다. 빗물은 닦아도 닦아도 자꾸만 흘러내렸다. 리바이는 아마 머릿속까지 흠뻑 젖은 모양이었다. 엘런은 리바이의 옆모습을 도둑처럼 훔쳐보다가 활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리바이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좀 모른 척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리바이는 “왜?” 하고 물으며 엘런을 쳐다보았다. “그냥...” 엘런이 말을 얼버무리자 리바이는 싱거운 놈이라고 했다. “비가 잠깐 오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하늘이 뿌연 색이야...” 리바이는 하늘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엘런은 입은 꾹 다물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론 자신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당장 손을 뻗어서 리바이의 어깨에 두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약간의 용기만 내면 될 일이었지만 그 약간의 용기를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리바이가 왜라고 물으면 어쩌지? 리바이가 싫다고 손을 치우라고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들 때문에 엘런은 머릿속으로 소리 없는 씨름을 했다. 그래서 엘런은 자신의 눈썹이 좀 찌푸려진 줄도 몰랐다. 하릴없이 손만 움찔거리는데, 별안간 리바이가 부르르 떨며 팔짱을 꼈다. “추워요?” 엘런이 물었지만 리바이는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운 것 같은데요.” 다시 엘런이 말했다. 이번에 리바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더 진한 녹색으로 젖고 있는 나무숲만 바라보았다.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엘런은 리바이에게 반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하니 팔끼리 닿았다. 엘런은 그대로 팔을 들어 리바이의 어깨를 감쌌다.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겁냈지만 막상 해 놓고 보니 대단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엘런은 심지어 리바이의 어깨를 문지를 여유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안 추울 거예요.”
리바이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 정반대였지.” 리바이 말로는, 전에는 자기가 엘런을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엘런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옛 기억은 아직도 생생했다. 리바이와 처음 사냥을 나왔다가 오늘처럼 비를 맞은 일. 그때는 숲이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그래서 엘런은 리바이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눈을 감았더니 귓가에선 둥둥 울리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리바이는 엘런의 등을 슬슬 쓰다듬어주었는데, 그때 엘런은 몹시도 부끄러웠다.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오랜만에 그 기억을 떠올리곤 엘런은 씩 웃었다.
작년 봄에 엘런은 리바이의 키를 따라잡았고, 그 후로도 쑥쑥 자라서 이제는 리바이보다 훨씬 크다. 이제 엘런은 리바이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엘런은 리바이와 키 재어보기를 좋아했는데, 그럴 때면 리바이는 건방지다며 그것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리바이의 눈치를 살필 필요 없이 머리꼭지를 맘껏 내려다볼 수 있었다. 심지어 리바이도 엘런의 허리를 안고 있었다. 엘런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앞으로 몇 시간, 아니 하루 종일, 어쩌면 영영 비가 멎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리바이가 자신을 이렇게 끌어안아주니 말이다. 문득 엘런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좋은 거 알려줄까요?” 엘런이 말하자 리바이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엘런은 가슴팍으로 리바이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리바이의 귀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도록. 그렇게 하면 엘런은 리바이에게 둥둥 뛰는 심장소리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리바이가 엘런에게 알려주었듯이. 얼마간 순순히 따라주는 것 같던 리바이는 갑자기 엘런을 퍽 밀쳤다. “뭐 하는 거냐?” “조, 좋은 소리 안 나요?” 엘런은 리바이가 친 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나도 안 좋아.” 그리고 리바이는 고개를 휙 돌려버렸는데, 그 순간 엘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리바이의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았다. 엘런은 방금 자신이 맞게 보았는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리바이의 얼굴을 살펴볼 용기는 없었다. 만약에 정말로 빨개진 게 맞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래도 방금 전엔 너무 심한 장난을 친 것 같다. 이렇게 어쩔 줄 모르겠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어쩐지 리바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사과를 해야 하나? 괜찮으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좋나? 엘런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또 다시 소리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 비가 멎지 않기를 바랐던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리바이가 마치 절벽에 핀 꽃 같다고 생각하는 엘런 보고싶다
그러다 나중에 리바이에게 열흘 붉은 꽃 없네요 했다가 얻어맞는거 보고싶다
오 지금생각하니 공주의남자도 에레리로 괜찮을듯 하군.. 반정을 일으킨 아버지로 인해 졸지에 왕족이 된 리바이와, 졸지에 멸문지화 당한 엘런
처음에 에레리는 정략결혼을 앞둔(그러나 내심 서로 좋아하는) 관계였다가, 리바이 가문이 반정을 일으키면서 폐위된 왕의 최측근이었던 예거 가는 삼족이 멸하고, 그로써 에레리는 완전히 척지게 되는거
공주의남자는 세령이가 분투하는게 좋았는데ㅋㅋ 자기좀 믿어달라고 하면서 화살도 대신 맞고ㅜ.ㅜ 드라마는 후반에 좀 늘어졌지만 그래도 결말까지 마음에 들었다. 그 중간에 폐위된 원래 공주 이야기도 좋았고..
아무튼 지금 생각하니 공주의남자의 김승유는 엘런으로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야 ㅋㅋㅋ 젊은 몸 다 상해가면서 복수하겠다고 돌아다니는 꼴 보면 짠한 것이... 복수에 눈 멀어서 연인이었던 사람도 못알아보고
짝사랑하는 리바이 정말 좋군ㅜㅜ 리바이는 막상 엘런에겐 데면데면 어색하게 대하는데, 밤이 되고 침대에 누우면 아까 낮에 스쳤던 엘런 손등이나 땀 때문에 제비꼬리처럼 뭉친 목덜미의 머리카락 같은거 떠올리면서 조용히 허공만 바라볼듯
내가 그 놈을 좀 다르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자각도 도둑처럼 몰래, 침투하듯 찾아와서 리바이 스스로도 자연스럽게 납득했으면 좋겠다. 짝사랑 중에 그걸 부정하고 혼란을 겪기보다는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쪽이었으면.
리바이의 지극한 순정.. 엘런에게서 뭔가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못할 것 같다. 자기 감정이랑은 별개로 엘런에게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면.. 감히 원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사고가 그렇게 되질 않아서. 좋아하는데 더이상 뭘 어쩌나, 이러기만..
자기 감정을 공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 하는 거지 ㅇ<ㅡ< 그래서 밤마다 엘런 생각은 닳도록 하고 날로 수척해지는데 혼자 정은 깊어져 가고ㅋㅋㅋ 엘런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상사 대하듯 깍듯하기만 해서 리바이는 은연중에 상처였으면 좋겠다ㅎㅎ
리바이는 날때부터 섬세한 사람이 아니라 엘런때문에 섬세해질 수밖에 없게 된건데ㅜㅜ... 엘런은 리바이를 존경하는 상사로 생각하고 있으니 리바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칼같이 선긋고 알아서 물러나는데 그런 깍듯한 행위 하나하나 리바이는 서운하겠지
그 연모하는 감정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에 그걸 안고 가는 것이나 해소하는 것까지도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엘런에게 몹시 휘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리바이는 감정의 주인이 바로 너였구나 하는걸 깨닫겠지.. 그리고 얼마간 비참한 기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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