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 너 배구 그만두냐?!”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오이카와는 그게 이와이즈미의 연락인지 어쩐지도 몰랐다. 하지메 녀석이 헛소리를 할 때가 다 있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며칠 날이 궂어서 아침녘에도 저녁처럼 컴컴했다. 뭐라고 대답좀 해 보라며 이와이즈미는 채근했고, 오이카와는 눈썹을 찡그리며 눈을 비볐다.
“무슨 소리야 그게?”
“쿠니미가 그러던데? 너 배구 관둔다고 했다며.”
“.........이와, 이런 걸로 장난치면 나 화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이카와는 딱딱하게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그러나 화를 냈다. 당장 부실로 오라며.
비가 푸슬푸슬 내렸다. 아직 방학이었고, 그날은 오후부터 훈련이었으므로 밀린 잠을 푹 자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듣는 소리가 그것이라니 오이카와 역시 짜증이 났다. 일단 그는 아오바죠사이의 주장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봄고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었다. 3학년들과 퇴부시기를 논의하긴 했어도, 쿠니미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배구를 때려친다는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해본 적 없었다. 오이카와 스스로도 그런 고민은 해본 적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어디서 누가 그따위 소릴 하고 다닌 거야, 하고 오이카와는 그럴 만한 놈들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라이벌은 많아도 남을 모함할 만큼 성격나쁜 놈들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만약 그런 놈이 있다면 한대 때려줘도 성이 풀리지 않을 테다. 오이카와는 발에 걸린 돌멩이를 저편으로 걷어찼다. 찌푸린 하늘에선 안개비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가 빗물로 끈적끈적해졌다.
“처음부터 설명해. 남김없이.”
“그러니까 설명할 게 없대도...!”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끼고 엄포를 놓았고 오이카와는 억울하게 읍소했다. 부원들은 대부분 울상을 하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고 개중에는 이와이즈미처럼 야쿠자같은 얼굴로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주장의 중대한 결정을 까맣게 몰랐다는 배신감에서 비롯된 감정인 것이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은 오이카와인데.
“나는 배구 관두는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 그 얘기 누가 했는지 나도 알고 싶다니까 진짜.”
“그럼 쿠니미가 없는 얘길 하겠냔 말이야.”
“쿠니미는 어디 갔어? 나도 좀 따져보자, 어?”
“지금 제 욕 하시는 거예요?”
때마침 쿠니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소문의 최초 공급자인 쿠니미는 왜들 모여있냐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험상궂은 표정들을 훑어본 쿠니미는 곧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자초지종은 이랬다. 지난 주, 미야기 고교배구 친목회인지 뭔지를 다녀온 쿠니미는 타교 선수들과 핸드폰번호를 나누었다. 건너건너 알게 된 선수들끼리 몇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서로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가볍게 물어보는 수준이었다. 봄고에는 누가 출전하는지, 누가 어느 대학에 진학하는지, 그런 것들. 그리고 어젯밤 누군가 쿠니미에게 이걸 물었을 뿐이다.
‘오이카와 토오루, 배구 관둔다며?’
그래서 쿠니미는 이와이즈미에게 그게 진짜냐고 물어봤고,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따졌을 뿐이다. 결국 아오바죠사이는 오이카와가 돌연 폭탄선언을 할 리가 없다는 데 납득했다. 문제는, 아오바죠사이 외에도 소문이 파다해졌을 거란 사실이다.
“세이죠에 선배가 빠진 줄 알고 다들 안심하면 좋은 거 아녜요?”
물론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오이카와는 현내에서는 베스트에 꼽히는 선수였으니까. 현내에서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와 붙고싶어 하는 사람은 우시지마 와카토시와 카게야마 토비오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 무슨 일 났어요??!”
다짜고짜 들이닥쳐 소리를 지르는 토비오 녀석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한번 걸려온 영상통화를 거부했더니 카게야마는 즉시 아오바죠사이로 뛰어왔다. 그 옆에 쬐끄만 신입생을 대동하고서 말이다. 오이카와는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로 질색을 했다. 아 그거 참, 아니라니까 왜들 이래? 하면서. 이와이즈미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그애들에게 음료수를 던져주었다. 카게야마는 소문이 헛소리였다는 걸 깨닫고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네들은 아오바죠사이와 한번 더 붙어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섭섭할 뻔 했잖아요. 떠날 때 떠나더라도 대결은 하고 떠나요. 봄고 말입니다.”
“......토비오, 내 속 뒤집어놓으려고 여기까지 왔지?”
진심으로 오이카와는 짜증을 냈다.
[시간 있나?]
우여곡절 끝에 그날 훈련을 마치고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오이카와는 땀을 훔치며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잘못 보낸 문자 같지는 않았다. 단 네 음절에서도 느껴지는 무뚝뚝함은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던 오이카와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답장했다.
[누구?]
그리고 십오 분 뒤 답장이 왔다.
[우시지마 와카토시.]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엔 우시지마가 세이죠 쪽으로 오기로 했다. 그쪽에서 직접 와 준다는데 못 만나줄 건 없었다. 오이카와는 일단 출발하라고 한 뒤 적당히 시내의 패밀리레스토랑 이름을 하나 찍어주었다. 일곱 시쯤 온다고 했으니 저녁을 먹어도 좋고, 밥 생각이 없다면 음료 한잔 마시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냥 가볍게 만날 장소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 몹시 놀랐다. 우시지마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을 거라곤 한 번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만날 약속을 잡았다니. 약속장소로 향하면서도 오이카와는 어쩐지 속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몰래카메라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푸슬푸슬 내리던 비는 일단락되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끄물끄물했고, 오이카와는 우산을 한 손에 쥐고 걸었다.
정확히 일곱 시가 되어 우시지마는 나타났다. 가게 문이 열리고 두리번거리는 낯익은 얼굴에게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맞은편에 앉는 우시지마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그들이 어떻게 비쳐질까 잠시 생각했다. 길고 건장한 체격, 운동선수임을 뽐내듯 져지 차림에 스포츠백을 멘 두 사람. 선수복이 다르니 어쩌면 남들 보기에도 라이벌 같을지도 모르겠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 앞에 놓인 주스잔을 가리키며 같은 것으로 주문했다.
“자몽주스 좋아해?”
“과일은 다 좋아해.”
“흐응.”
건성으로 대꾸하며 오이카와는 스트로우로 잔을 휘저었다. 오이카와는 한쪽 턱을 괴고 잔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 끝에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은퇴 얘기 말인데,”
“잠깐만. 이젠 은퇴라고?”
기가 찼다. 우시지마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면 이 일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야기가 와전되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은퇴라는 건 프로로서 이름을 날려본 사람들이 물러날 때에나 쓰는 단어 아닌가. 오이카와는 아직 마음껏 배구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억울했다.
“......네가 배구를 그만둔다고 해서. 나는 지난 한 주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응, 그렇긴 한가보네. 지금 국어책 읽는 것처럼 말하는 거 보니까.”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다시 생각하고 자시고, 나는 애초에 관둔다고 말한 적이 없거든요.”
“?”
우시지마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이카와는 부원이나 카라스노 꼬맹이들이 들볶지 않았더라면 우시지마의 반응이 재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따위 소릴 누가 한 거야? 왜 내가 거짓말을 해명하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분명 네가 지난주에, 관둔다고 하지 않았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순진하게 커다래진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기분이었다.
“네가 범인이었구나. 우시와카.”
이 순진한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오이카와는 탄식했다.
지난주 오이카와와 만난 이후 우시지마는 그가 배구를 곧 관둘 거라고 생각했나 보았다. 우시지마는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며칠을 혼자 생각하다가 텐도에게 물었단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그만둔다는 게 진짜냐고. 그리고 텐도는 시라부에게, 시라부는 고시키에게, 고시키는 다른 학교 배구부에 수소문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오해는 바람을 타고 돌고 돌아 오이카와에게까지 닿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해의 바람은 오이카와와 우시지마 두 사람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유언비어의 시발점이 오이카와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바른 자세로 허리를 펴고 오이카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모양이 망가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해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지만 너는 봄고에 나가겠다고 하지도 않았어. 대학에 가서도 계속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잖아.”
“그렇다고 해서 그게 은퇴란 뜻은 아니지 않아? 우시와카.”
“......”
“너 네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했는지 모르지.”
“.........내가 오해했다면, 다행이다. 다행이다 오이카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머리 긁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우시지마의 얼굴이 물렁해진 것이 보였다. 카라스노 녀석들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왜 죄다 안심이라는 반응일까. 오이카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 계속 배구를 하는 거지?”
“봄고에는 나가. 하지만......”
오이카와는 말을 맺지 못했다. 봄고에는 나간다. 하지만 그 후에, 그 후에는 말이야. 뒤따라올 말들은 주춤거리며 입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게 여름 내내 오이카와 토오루를 우울하게 만든 이유였다.
사람들은 우시지마를 보면서는 당연히 프로선수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왜 그가 아직도 프로가 아닌지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나이가 아직 어리다는 점은 간과하고서 말이다. 그걸 뛰어넘는 기량이 우시지마에게는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국가대표가 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까지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냐는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담임교사는 그에게 체육교육과를 추천해주며 좋은 체육선생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오이카와 토오루와 배구를 긴밀하게 연관지어 생각해주긴 하지만, 그가 배구선수로서 활약하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부원들이나 라이벌들, 우시지마 정도였다. 오이카와와 한 번 이상 붙어봤고 그가 얼마나 잠재력 있는지 가치를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이 곁눈으로 봐도 천재인 정도, 그 정도는 못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이카와에게 배구선수란 마땅한 방향이 아닌, 가능한 선택지의 일부였다. 그게 우시지마와 오이카와의 차이였다.
“사람들은 다 너같지 않단 말이야.”
죄없는 자몽주스를 노려보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시지마에게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시지마에게는. 누구는 우시지마와 오이카와를 두고 호적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사자들의 입장은 요만큼도 헤아리지 않은 무신경한 단어.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성장시키고 있다면 그건 호적수가 맞을 테다. 우시지마는 어떨지 모르지만, 오이카와는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우시지마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시지마로 인해 오이카와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오로지 오이카와만의 고통이었다. 그것들 덕분에 절벽 끝에 밀려나있는 기분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봄고까지 다 치르고 나면 이젠 정말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고교대회는 없고, 더 이상 오이카와는 유망주로 불릴 수 없을 거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호적수도 무엇도 아닌 그냥 고교 졸업생일 것이다. 오이카와는 바로 그게 두려웠다. 봄고 예선에서까지 떨어지고 나면 그때에는 정말로 마음이 곤두박질칠까봐. 지금은 이렇게나 사랑해마지않는 배구를 그때에는 싫어하게 될까봐. 그리하여 배구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봐. 배구를 관둔다니, 오이카와는 그 두려운 일을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만 떠들었지. 그들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니까 말이다.
테이블에 팔을 괴고 오이카와는 철퍽 엎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한동안 오이카와는 눈앞의 검은 화면만 들여다보며 쏟아지는 피로를 느꼈다.
“나라고 해서 그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야.”
우시지마가 낮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뒤통수만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우시지마는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들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도 늘 생각한다. 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하는 것.”
“......”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어느 날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거고. 어느 날 재미없어질 수도 있는 거고.”
“......”
“그리고 나는 후자 쪽이 더 무섭다, 오이카와. 지금은 배구가 재미있지만 프로에 입단하고 나서도 지금처럼 재미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더는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눌린 이마를 문지르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있어야 네 배구가 재미있어진다, 이런 거야?”
“부정할 수 없지.”
우시지마는 조금 웃었다. 정말이지 녀석은 알기나 하는 걸까. 오이카와가 지금 웃은 건 결코 친절이 아니었는데. 그건 자조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말이다. 속도 없이 웃는 얼굴을 보니 그쯤 되어서 오이카와는 심술부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얼음이 녹아서 맹탕이 된 주스를 쭉 들이켰다.
밖에는 줄기가 굵은 빗발이 내리치고 있었다. 우시지마에겐 우산이 없었다. 그들은 비의 기세가 사그라들길 기다리며, 대화가 끝난 후로도 한 시간여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멀뚱히 앉아만 있는데도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가 침묵을 옅게 해주었다. 빗물로 얼룩진 창문에 그들 모습이 비쳐보였다. 흐물거리고 일렁이며 녹아내릴 것 같으면서도 형체는 튼튼했다. 문득 오이카와는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감자튀김을 가득 주문했다. 비가 잦아들면 곧바로 자리를 뜰 우시지마를 위해 조리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은 시키기가 뭐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너라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라고 했지만 오이카와는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결국 그들은 비가 밤까지 내릴 거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감자튀김을 하나둘씩 모두 집어먹고 난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무식하게 기다려봐야 답이 없을 것 같지.”
“그럼 밥은 다음에 먹지.”
우시지마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었다.
역까지 가는 길이 복잡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인파가 많은 시가지라 자꾸만 사람들과 우산을 부딪쳤다. 오이카와의 장대우산은 크기가 넉넉하더라도 어쨌거나 일인용이었고, 키가 180센티가 넘는 사내애들이 나란히 쓰기엔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그들은 어깨 한 쪽씩을 비에 적시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우시지마는 그게 미안한지 연신 손등으로 우산대를 오이카와 쪽으로 밀었다. 오이카와는 고집스레 우산대를 더 높이 들 뿐이었다.
“왜 이러셔. 어차피 다 젖은 거.”
딴에는 친절이랍시고 한 말이었다. 우시지마는 이해할까. 오이카와는 라이벌에게는 선정을 베푸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따라서 우시지마는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다는 걸. 물론 오이카와는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역에 다다라 그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우시지마가 오이카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는 훌륭한 세터다. 언젠가는... 너와 팀이 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어.”
우시지마의 고백은 불시에 터져나왔다. 뜻밖에 오이카와는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편으로 돌렸다. 후배들에게 사랑고백을 받을 때에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미쳤다고 생각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문장만 외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면 이렇게 낯간지러울 일이 아닌데. 오이카와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는 우시지마를 배구밖에 모른다고 나무랄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사실은 그랬다. 우시지마 같은 녀석들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도 없었다.
우시지마가 스트레이트를 날린 직후 조금은 어색해진 공기 속에서 그들은 한동안 부유했다. 시라토리자와를 향해 가는 우시지마와, 집으로 돌아가는 오이카와는 두 정거장을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전철 안은 붐볐다. 나란히 섰더니 어깨가 자꾸 부딪쳤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곁눈으로 흘긋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적신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일 테다. 오이카와는 모르는 척, 가까이 서니 우시지마가 확실히 크긴 크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오 센티쯤 차이나려나. 몸무게도 근육량도 우시지마가 더 많기 때문에 오이카와보다 훨씬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얼마간은 어색한 두 정거장을 지나쳐, 오이카와는 플랫폼에 내려 우시지마에게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우시지마가 얼떨결에 그를 따라 손을 들었다. 그러자 오이카와는 잽싸게 그에게 우산을 던져주었고, 우시지마가 그것을 받자마자 문이 닫혔다. 오이카와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날 오이카와는 한 가지 인정했다. 그간 우시지마의 속을 모르겠다고 한 것은 그저 오이카와의 피해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시지마는 속을 감추는 타입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에두르는 방법이라곤 요만큼도 모르는 녀석이고,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다 진실이다. 곧이 듣고 믿어도 좋을 말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바르게 직시한다.
그때의 어색하고 긴장되었던 공기를 오이카와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우시지마의 고백 때문에 경색되었던 기류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건 다른 종류의 고백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오이카와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십대의 끝자락에 엉켜있던 감정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던 것들. 기류에 휩쓸리듯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래서 놓쳤던, 되짚어보면 분명했던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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