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키가 컸다. 열두 살이 넘어갈 무렵부터는 일 년에 오륙 센티씩은 거뜬히 자랐고 그놈 참 잘생겼다는 칭찬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본격적으로 2차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그에겐 벌써 청년 태가 났다. 안정적으로 뻗은 어깨와 길쭉한 팔다리, 허벅지와 팔뚝에 붙기 시작한 근육들로 그는 단연 돋보였다. 그는 그저 호리호리한 미소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다부진 골격을 찬탄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꼭 운동선수 같아. 토오루는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운동선수였다. 배구를 위해 써먹지 않으면 아까운 몸이라고, 그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다. 껑충한 키나, 팔다리 같은 것은 노력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체조건을 타고난 운동선수란 얼마나 복되었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노력하여 갈고닦지 않으면 그가 축복처럼 타고난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수가 있었다. 오이카와가 과신하는 인물이었다면 재능은 고만고만한 재주 수준에서 그쳤을 것이다. 고교배구의 세계에선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노력에 관해서라면 오이카와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훌륭한 선수로 갈고닦았다. 타고난 몸에 센스가 깃들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만의 것이었다. 고교 3년은 물살처럼 흘렀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고교 3학년, 오이카와를 내내 괴롭게 했던 질문이다.
아오바죠사이에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우시지마 와카토시. 고교배구부에 들어오고 나서도 그들의 대결구도는 여전했다. 그러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비등했던 두 사람의 체격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신체조건이란 현역 국가대표 선수에 비견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아직 몸이 여무는 단계에 있는 오이카와가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재의 신체와 기술은 오이카와가 애쓴다 하여 따라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둘의 간극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졌고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이기지 못했다. 시라토리자와에는 번번이 패하는 와중, 카게야마 토비오가 미야기 고교배구의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카게야마는 중학교에서 그랬듯 오이카와의 옷자락을 움켜쥐기 일보직전까지 따라잡아 있었다. 카라스노가 무서운 속도로 부상했다.
다시,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점점 오이카와의 숨통을 조이고 들었다. 평행하게 달린다고 생각했으나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 있는 이들. 성실함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그들 사이에 있었다. 오이카와는 평범한 고등학생과 운동선수 사이 애매한 곳으로 점점 밀려났다. 봄고 예선전, 아오바죠사이는 카라스노에 석패했다.
6년. 오이카와의 배구인생은 잔인하리만치 짧았다. 6년은 오이카와의 남은 시간을 고통스럽게 만들 만큼은 충분히 길었다. 봄고 예선탈락이었다. 경기에서 패한 이후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쿵 떨어진 말은 하나다.
만년 유망주.
세상에 재능있는 자들은 모래알처럼 많고 그걸 갈고닦는 자들 역시 별처럼 많다. 배구는 결코 오이카와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오바죠사이가 시라토리자와 아닌 다른 학교에 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다시없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임했던 시합이었다. 아오바죠사이 최정예 멤버, 최강의 전력으로 상대했다. 어느 때보다도 확신을 갖고 기대했던 우승이기에 절망의 깊이 역시 어느 때보다도 깊었다. 오이카와라고 패배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패배한 다음에는 화가 나고,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절망감이 들고 한동안은 침울했다. 유난히 실수가 잦아서 질 만한 경기가 아니었음에도 진 경기에서는 선수들끼리 감정싸움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아오바죠사이는 준비된 팀이었고, 경기에서 지더라도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이 없는 경기는. 카라스노에 패한 데서 기인한 침울함에는 슬픔이 섞여 있었다. 그 어떤 경기에서도 슬픔은 느껴본 적 없었다.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이와이즈미와 헤어져 집에 돌아오고, 비로소 홀로 되었을 때 오이카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심정을 매 초마다 느꼈다. 바닥없는 계곡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기분.
경기의 여파는 길었다. 이와이즈미를 비롯한 배구부 동기들과 붙어있어야만 슬픔이 자신을 덮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같은 조각을 나누어쥐고 있던 이들끼리의 유대감이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주었다.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일까. 오이카와는 침울해하는 와중에도 제 마음자리를 더듬어보았다. 그건 미련에 대한 슬픔일 수도 있었고 통한에 대한 슬픔일 수도 있었다. 오이카와가 너무나 사랑했으나, 그에게 가차없었던 배구에 대한 슬픔일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아오바죠사이의 현내 베스트라는 위상의 이면에는 그들이 노력으로 갖다바친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운동선수의 세계는 개개인의 노력을 갸륵하게 여겨줄 수는 없었다. 결국 오이카와에게 남은 것은 절망감이었다.
오이카와가 고교배구를 떠날 때 카라스노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봄고 대표결정전, 카라스노는 아오바죠사이를 꺾고 시라토리자와도 꺾었다. 미야기 배구계의 돌풍이었다. 누구도 아닌 시라토리자와가 현 예선에서 탈락할 거라곤 누가 농담이나 했을까. 카라스노 역시 자신들의 승리를 점쳤던 것은 아니었던지 이겨놓고도 눈물바람으로 서로를 끌어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오이카와는 시라토리자와 선수들이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아오바죠사이의 진로가 막힌 이상 누가 우승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시라토리자의 추락을 바라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가 못했다.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울음을 터뜨렸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오이카와가 조금 앞서 절절하게 느껴본 감정들. 그날 오이카와는 찻잔 속의 태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얼굴을 뒤로하고 오이카와는 경기장을 떠났다.
열여덟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겨울이 서둘러 찾아온 해였다.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길 무렵에는 이미 뼈까지 시린 겨울에 들어 있었다. 머플러와 장갑, 두터운 후드를 껴입어 버틸 수 있는 계절은 물러간 지 오래였다. 실외에 나가면 입김이 새하얗게 번졌다.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계절이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고개를 들면 텅 빈 허공이 머리위로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회색 겨울하늘은 오이카와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주었다. 소중한 것을 상실한 계절이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질주했으나 막다른 벽에 부딪쳐 나동그라진 오이카와의 여정은 교착상태였다. 얼어붙은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허공만 올려다보고 있는 처지였다. 바닥없는 계곡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은 여전히, 수시로 오이카와를 괴롭혔다. 슬픔은 계단을 올라서듯 훌쩍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이카와의 일상은 아직 건재했다. 아침 다섯 시면 눈이 떠졌고, 한 바퀴 러닝을 하고 땀을 씻어내야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과 이온음료를 고수했다. 때가 되면 규칙적으로 스트레칭을 했다. 관성이 된 습관들. 간간이 배구연습에도 참가했다. 어디까지나 후배들을 코칭하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팀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봄고 예선을 전후해서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다시는 아오바죠사이 선수복을 입고 경기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했다. 그 혹독한 사실 하나가 오이카와를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 추위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몇 번인가 눈이 내렸다. 거리에는 붉고 푸른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내걸리기 시작했고 상점가를 거닐면 흥겨운 캐럴이 들려왔다. 연말의 풍경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시지마에게서 연락이 온 건 그 무렵이었다. 메시지는 짤막했다. 시간이 있으면, 지난번 못 먹은 밥을 먹지 않겠냐며.
약속장소는 지난번 만났던 그 시가지였다. 우시지마는 연습이 없으니 아오바죠사이로 넘어오겠다고 했다. 우시지마는 무뚝뚝한 외모와는 달리 인간관계에 꽤 성실한 모양이었다. 6년을 알고 지냈어도 새삼스러웠다. 얘가 이랬던가 하는 생각들이 드는 것을 보면, 따지고 보면 말이야 6년이지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사복차림으로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만나자마자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우산을 건네었다. 지난번 오이카와가 떠안겨주었던 그 우산이었다. 쓰던 우산이 보이지 않는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라, 오이카와는 좀 놀란 눈을 했다.
“땡큐. 완전 잊고 있었는데.”
“그날 고마웠다.”
우시지마가 짧게 인사했고,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곤 앞장서서 걸었다. 자리가 거의 다 찬 정식집을 골라 들어와 똑같이 하이라이스 정식을 주문했다. 우시지마에겐 평소처럼 대했다. 오이카와는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가볍게 물었고, 우시지마는 성실하게 대꾸했다. 요즘 얼마나 운동하는지, 시라토리자와 배구부는 뭘 하고 있는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우시지마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물론,
“졸업한 후엔 어디로 가나?”
“......생각중이야.”
밥 먹으면서 할 이야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곡절과 고민이 얽혀있는 문제다. 오이카와의 뜻을 알았는지 우시지마는 눈썹을 찡그리거나 더 묻지 않았다. 거기까지였다. 이따금씩 오이카와가 눈을 들어 우시지마의 얼굴을 살폈으나, 우시지마에겐 딱히 먼저 만나자고 한 의중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따뜻한 밥과 국물을 천천히 떠먹는 동안 속이 데워졌다. 계산은 우시지마가 나서서 했고, 오이카와는 그가 그렇게 하도록 그냥 두었다. 그리고 공원에 가서 좀 걷자고 제안했다. 음식을 먹어 속이 따뜻해졌으므로 추운 바깥공기가 기껍게 느껴졌다. 미약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그해 처음으로 맞는 눈이었다.
“괜찮은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괜찮은 거야?”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날이었고, 삭막한 공원엔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가장 궁금해 한 것은 그것이었다. 둘은 말없이 걷다가 적당한 벤치를 골라 나란히 앉았다. 엉덩이가 차가웠다.
“......”
우시지마는 언뜻 대답하지 않았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 테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이어 말했다.
“넌 앞으로도 배구를 할 거라고 해도 말이야, 타격이 없는 건 아니잖아. 시라토리자와가 봄고 예선에서 탈락했다고.”
“......”
“그것도 카라스노에 져서.”
“물론 아쉽다. 카라스노의 그 신입생 콤비는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기대한 건 너희와의 경기였으니까.”
“......”
“괜찮냐 괜찮지 않냐 하면, 당연히 괜찮지 않다.”
우시지마가 담담히 고백했고, 오이카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시지마나 오이카와나, 고교배구를 졸업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둘은 팀의 주장이었다. 그들에겐 죄책감마저 있었다. 다만 우시지마가 아쉬워하는 이유에는 단지 경기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아오바죠사이와 한번 더 경기하지 못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거기까진 예상치 못했던 터라 오이카와는 발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오이카와 너는? 아까 진로를 생각하고 있다고.”
우시지마가 물었다. 오이카와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한숨같은 입김만 조금 흩어져나올 뿐이었다. 그것이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걸 보며 오이카와는 목을 가다듬었다.
“......도쿄 체육대학에서 제의가 들어왔어. 특기생 전형으로 실기시험을 쳐달래."
“그러면 다행 아닌가? 너는 배구를 하고 싶어 했잖아.”
“......”
억지로라도 배구를 계속할 순 있겠지. 체대가 아니라 다른 대학에 진학해서도 배구부는 들 수 있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마음만 먹으면 대학리그에서 뛰는 것은 가능할 테다. 배구선수로서의 생명을 좀더 연장할 수는 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천재가 아니므로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나쳐 앞서달리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이 좌절할 수 있다. 막다른 벽에는 언젠가 도달한다. 운동선수에겐 반드시 시한이 정해져있다. 그 시한이 다시 임박하고, 다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시점은 반드시 온다.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마침내 오이카와가 현실과 배구를 저울질해 현실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물론 두 가지는 결코 저울질할 만큼 대등하지 않았다. 오이카와에게는 배구가 압도적으로 무거웠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고민을 하게 될 바엔 지금 배구를 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현실과 배구 중에서 과감하게 현실을 포기할 수 있는 지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 현실을 택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배구를 하고 싶어도,”
목이 메어 말이 뚝 끊어졌다.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굵직해진 눈송이들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물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울음. 마지막 경기날 실컷 운 이후로 줄곧 참아왔던 눈물이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돌렸다. 이미 울고 있는 얼굴을 들키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참을 수 없이 나약해지는 순간에도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애썼다.
우시지마가 가까이 다가와 오이카와의 옆으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스치며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손에서 우산을 빼내었다. 그리고 우산을 펴서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눈송이가 오이카와를 적시지 못하도록.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다정한 배려의 몸짓을 오이카와는 느낄 수 있었다. 우산이 그들을 한데 있게 했다. 그리하여 오이카와는 우산 아래의 좁은 세계에서 마음놓고 울 수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졌고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이따금씩 숨을 왈칵 토해내며 오이카와는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경기를 치른 여파를 오이카와는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시한이 임박했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배구를 선택하는 일을 주저하도록 만들었다. 지난 6년간 배구가 오이카와에게 절절하게 가르쳐준 것은,
“그래도 너는 배구를 좋아하잖아.”
우시지마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우느라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우산을 나눠쓰고 있는 터라 우시지마는 아주 가까이에 앉아있었다. 어깨가 닿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얼굴은 퍽 낯설었다. 강한 인상에 비해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다. 코트에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 우시지마가. 그 우시지마가 지금 자신에게 다정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소매를 말아쥐고 눈물을 털어냈다. 그 즉시 눈물이 눈물길을 타고 흘렀지만.
“배구를 좋아하지 않나. 그거면 되지 않겠나.”
듣기 힘든 말을 잘도 한다. 오이카와는 이제 눈물을 닦으려는 시도도 않고 제 무릎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눈물이 들을 때면, 그냥 흐르도록 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참고 견딘다 하여 해소되는 슬픔이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마저 울도록 기다려주었다.
“......우리 감독님도 그런 소린 안 해.”
한참 만에 오이카와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조는 딱딱했으나 오이카와의 목소리엔 비난의 기색이 실려있지 않았다. 한바탕 울어서 속에 진물처럼 고인 것들을 흘려보낸 덕분이었을까. 어느 정도 오이카와는 평정을 찾고,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말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가 눈가를 문지르는 걸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러나 우시지마는 어떻게 그게 진심이 아닐 수가 있냐는 반응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배구를 좋아하고, 그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시지마는 배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났을 거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우시지마는 매번 놀랄 만큼 속이 배구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결국 오이카와는 조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알지, 우시와카. 너 정도 되어야 그런 말 할 수 있다는 거.”
그 말에는 우시지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오이카와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입 꼬리를 당겼다. 이번에는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한 미소였다. 우시지마가 옳았다.
그들이 배구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좋으니까. 그게 다였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의 마음을 짚어주었다. 오이카와의 얽히고설킨 감정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을 건져주었다. 그리고 그의 올곧은 입으로 말해주었다. 어떤 말이 그것만큼 오이카와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우는 사람을 웃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일을 우시지마는 해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배구를 좋아하잖아. 오이카와가 반박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바로 그거였다. 그래서 정말로, 그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사위가 맑아진 눈으로 눈송이들을 바라보았다. 우산 위에 눈송이들이 소복하게 쌓이는 소리를 들었다. 일렁이는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참 이상하게도, 한마디 말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상대가 오래 알고지낸 사람이어서 그럴까. 그렇다기에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나는 1월에 미국으로 가.”
얼마간의 침묵 뒤에 우시지마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다음 달이잖아? 아예 떠나는 거야?”
“1, 2년 정도. 그곳 실업팀에서 훈련할 계획이다. 지난 가을에 스카우터가 왔고... 에이전시와 이미 계약했다.”
“......진짜 우리랑은 다른 세계를 사는구나, 우시와카.”
“나는 거기서 활약할 거다. 세계에서 경험을 쌓은 뒤에 국내로 들어올 거야. 국가대표가 내 목표니까. 그리고 오이카와, 그때에는,”
잠시 우시지마는 말을 멈췄다. 오이카와는 이미 우시지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돌릴 수 없이 그에게 함몰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팀에서 만나자. 그러니까 너는 체대에 가야만 해.”
“잠깐만. 내 진로를 왜 네가...”
“우린 몇 년간 헤어져있는 거다. 그리고 너는 여기서, 나는 그곳에서 실력을 쌓은 뒤에... 더욱 강해진 다음에, 다시 만나자.”
“잠깐, 잠깐만. 지금 꼭 네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상황, 뭔데?”
“달리 선택지가 있나?”
“......”
정직하고도 예리한 질문에 다시금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너무 옳은 말이어서 오이카와는 그만 입을 다물게 되었다. 오늘은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공기가 얼어붙고 있었다. 폭설이 쏟아질 전조였다. 오이카와는 그러나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공원을 나섰다. 홀가분해진 건 그였지만 우시지마까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이카와는 그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근데 미국이라니. 완전 낯선 땅이잖아. 네 성격에 거기서 잘 지낼 수 있겠냐.”
“너보단 덜 심술궂은 성격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농담하는 거야?”
“너야말로 사람들한테 심술부리지 말고, 잘 지내라.”
“우시와카가 뭐래?!”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어깨를 퍽 때렸다. 어이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저도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걸 아는 듯 웃고 있었다. 그 장난기 감도는 얼굴은 그들이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우시지마는 가만히 웃을 때 눈이 감겼다.
쏟아지기 시작한 눈 때문에 전철이 지연되었다. 오이카와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우롱차를 뽑아 우시지마에게 던져주었다. 천천히 다 마실 동안에도 열차는 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열차가 마침내 전 역을 떠났다는 전광판을 읽고는 운을 떼었다.
“근데 우시와카.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봐.”
“......솔직히 이해 안 되거든. 네가 왜 그렇게까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주는지 말이다. 오이카와는 낯이 간지러워 말끝을 흐렸다. 얼른 대답이 나올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이카와 너니까 그렇다.”
우시지마는 간단히 답했다. 그게 대답이 되겠냐마는 오이카와는 더는 묻지 못했다.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리, 졸업 축하한다.”
“......바보야, 아직 12월이야.”
그날 오이카와와 우시지마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인사였다. 오이카와는 이전에 그랬듯, 전철에서 내려 우시지마가 떠날 때까지 유리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밝아진 낯으로 작별할 수 있음이 기꺼웠다. 우시지마는 전철에 실려 멀어져갔다. 열차가 플랫폼을 떠난 뒤에도 오이카와는 한동안 역사에 머물러있었다.
오이카와는 우두커니 서서 우시지마와의 6년을 회고했다. 지긋지긋한 라이벌로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작별하기에는 아쉬운 녀석이라는 걸 그때에야 느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이제 와서. 우시지마와는 감정의 결이 같다는 걸, 왜 졸업이 임박해서야 알았을까. 오이카와는 눈썰미가 탁월했지만 어디까지나 배구를 할 때뿐이었다. 타인의 감정에는 둔감했다. 저 멀리 떠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들. 오이카와는 한발 늦게 알아채곤 했다. 늘 그래왔던 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더라면.
졸업이라는 건 십대의 끝자락에 든 소년들에게 거대하고도 묵직한 진리와도 같았다. 손쓸 도리 없이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처럼 말이다. 졸업은, 그들이 스무 해 가까이 몸담아왔던 세계의 끝이었다. 그전과는 다른 세계로 그들은 편입해야만 한다. 졸업은 오이카와 토오루에겐 고교배구의 끝을 의미했다. 한편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는, 짝사랑의 끝을 의미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려는 바로 그 시점에, 두 가지 의미는 자연스럽게 혼재되었다.
'HQ!!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우시오이] 익사 溺沙 1 (0) | 2018.07.03 |
|---|---|
| [우시오이] Eyes Wide Shut 1 (0) | 2018.06.06 |
| [우시오이] 공기의 흐름 4 끝 (0) | 2018.05.27 |
| [우시오이] 공기의 흐름 2 (0) | 2018.05.13 |
| [우시오이] 공기의 흐름 1 (0) | 2018.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