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소재 有
S U M M E R T I M E S A D N E S S
너를 미워한다. 너는 내 인생에 다시없을 재앙이다. 늘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새겨야 한다. 우시지마 나는 너를 미워해.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어떻게 갈무리하는지 너는 상상 못할 것이다. 너는 알 필요도 없고 너에게 알려줄 생각도 없다. 그건 오로지 나의 것이며 내 뜻대로 다스려야 할 불이다. 너에 대한 사적인 감정은 미움밖에 없으리라.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미워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저쪽에서 네가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교정을 가로질러 내게 오고 있었다. 네 두 손에는 시원한 얼음음료가 들려있다. 나는 직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지 잊어버리고 만다. 네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너를 미워하려던 시도는 물거품처럼 스러진다. 너는 내가 뿌리까지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없도록 했다. 아마도 너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지만. 너는 늘 그런 식이었다. 무심코 돌을 던지고는 개구리가 맞아죽는지 어쩌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너는 내게 돌조차 던진 적 없다 해야 옳았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내 안에 퍼지는 동심원은 뭘 탓해야 좋단 말인가. 나는 그냥 눈 먼 돌에 맞은 것이다. 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뜨거운 여름해에 시달리며 꼼짝없이 눈꺼풀을 깜박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였다. 여름의 순수한 잔인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사실은 네가 내 여름이지. 너는 내게 여름이었다.
모든 시작은 미야기에서 비롯됐다. 내 유년과 친구들과 배구에 관한 기억들은 모두 미야기에서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는 우시지마 너조차도 그렇다. 우리는 동향 출신이었고, 이로써 너를 안 지도 6년이 넘었다. 미야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너의 학교와 붙어서 졌다. 너처럼 리시브하고 너처럼 스파이크하면 승리한다는 것을 그 6년간 배웠다. 하지만 난 나의 방식을 고집했다. 늘 너는 내가 너의 학교에 갔어야 했다고 말했다. 왜 내가 너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고 번번이 질색했지만 너는 꿋꿋하게 고집했다. 네가 속한 팀의 세터가 나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의 배구를 위해서. 정말이지 넌 속도 편했다. 그걸 듣는 내 심정을 너는 한 번이라도 헤아린 적 있었을까. 없었겠지. 그러니까 매번 내게 같은 소릴 했던 거겠지. 나는 세터가 궁하면 다른 학교에서 찾지 그러냐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내가 네게서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도 그런 소리나 들어야 하는 내 처지가 우스웠다. 그보다 더 우스운 일은 내가 너와 같은 학교에 진학한 일이다.
너와 같은 학교에 진학했다. 더는 길을 잘못 들지 말라던 네 충고를 따른 것은 아니다. 이 학교에선 내가 계속 배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학교는 나를 운동선수로 길러줄 역량을 갖춘 곳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너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의 진로란 배구밖에 없었으므로 너와는 충분히 같은 학교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었고, 너는 우리의 조우를 우연이라 믿고있지만 내겐 필연이었다. 배구의 길에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다는 죄책감에 나는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그야말로 배구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 놀러다니지도 않고 훈련만 했다. 대학생활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관계없이 나는 너를 라이벌로 상정하고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점에서 말이다. 이제 너와는 배구로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같은 팀이고, 포지션도 다르니까. 너를 이겨야만 내가 나아갈 수 있었던 과거 같은 것은 미야기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너와는 감정을 겨루고 있다. 너와의 싸움에서 첫 승을 거머쥘 날이 언제가 될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쩌면 네게는 패배밖에 못하는 것일까. 이쯤 되면 너에게 승복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는 자존심이 엄청난가 보았다. 자존심이라기보다 이건 믿음이다. 네겐 너의 방법이 있고 내겐 나의 방법이 있다는 믿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코트위에 나란히 서 있다. 매일 배구연습이 있기 때문에 너와는 싫어도 얼굴을 매일 보아야 한다. 최소한 코트에서는 배구생각밖에 할 수 없다. 공이 이쪽 코트로 넘어온다.
“받았다!”
리시브된 공이 내 손 안으로 들어온다. 그 공을 받아 내 스파이커에게 토스를 올려준다. 내 토스를 너는 완벽하게 내리꽂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쾅 소리에 가까운 파열음이 체육관을 울린다.
“오이카와 나이스토스!”
주장이 환호했다. 우시지마가 손바닥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얼떨결에 마주친 손바닥이 연습 내내 화끈거렸다. 공과 토스에 집중해야 할 신경이 손으로 분산됐다. 그래서였을까, 사선으로 날아오는 볼을 블로킹할 타이밍을 약간 미스했다. 나는 재빨리 사이드라인 방향으로 점프했고, 마침 그 위치에서 점프한 네 몸과 쾅 부딪쳤다. 거의 충돌이었다. 온 옆구리로 충격을 받아 눈앞이 다 아찔했다. 그만큼 내가 무리해서 점프했다는 뜻이겠지. 공은 가까스로 튕겨냈다. 실점의 위기를 넘겼다.
“오이카와, 네 손.”
문득 네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나는 땀을 훔치며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어?”
손가락 사이의 살이 찢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네가 주장에게 알리자 주장은 타임아웃을 선언한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코트 밖으로 나온다. 하필 오른손이어서 붕대감기가 어설프다. 곧 네가 다가와서 내게 붕대를 단단히 감아준다. 커다란 손끝은 섬세하기만 하다. 내리깐 네 눈과 턱에 흐르는 땀방울 따위를 들여다본다. 옆구리엔 아직 너에게 충돌했던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호흡을 참았다. 감정을 복기한다. 나는 너를 미워하노라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안에 깃든 열망을 깨달은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였다. 첫 번째 인터하이 무렵이었으니까 한여름이었을 거다. 전파를 타고 송출되는 너의 여름을 바라보았다. 너는 도쿄의 코트에서 땀을 흘렸다. 빛을 받은 잎사귀처럼 반짝이는 네 여름에는 탐까지 났다. 너의 여름도, 빛나는 너도. 너의 여름들 두 눈으로 보고싶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누구도 아닌 우시지마 너를 두고 무언가 욕망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너에게 느끼곤 하던 일상적인 감정, 요컨대 질투와 분개심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너를? 내가 어떻게 너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세상에는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는 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세상엔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수두룩할 뿐 아니라, 내 마음조차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내 십 대의 끝자락은 너에 대한 감정과 배구 사이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내가 너를 원하는 만큼 네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너에게 갈애한다니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그간 너와 싸우고 번번이 졌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이 모든 걸 명료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난 네게 한 마디도 고백하지 못할 것이다. 알 수 있었다. 나는 차마 네게 갈애할 수 없다는 것을. 대신 나는 그 감정을 마음속 가장 깊고 깜깜한 부분에 묻어두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그림자 하나 꼬투리잡을 수 없도록. 그것을 매장한 주인인 나조차도 속일 수 있을 지경으로. 마음을 사장시키는 일은 푸른빛에 숯검댕을 덧입히는 일과 유사했다.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내 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배구와 감정을 완벽하게 분리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지만 그때는 더욱 미숙했으니까. 그렇지만 내 짝사랑의 방법은 그렇게 굳어지고 말았다. 그 해 여름이 선사한 굴레에서 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가 보았다. 가끔은 내가 짝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인정해도 괴롭고 인정하지 않아도 괴롭다면 차라리 인정하는 편을 택하겠다.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옛중국의 어떤 사람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온몸에 옻칠을 하고 숯을 삼켜 목소리를 뒤집었다던데. 난 내 사랑을 미움으로 덧칠하기로 마음먹었다. 너를 미워한다는 말은 기실 내 짝사랑의 변명이다. 가장 강렬한 사랑의 대척점에 있는 건 가장 강렬한 증오일 테다. 사랑과 증오는 그러나 스펙트럼처럼 이어져있는 것이다. 내 사랑과 증오는 각각 그 중간의 어디쯤에 있다. 어딘지 모르는 그 자리에서 너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증오와 애정은 맞닿아있음을 느끼며. 숯을 삼킨 사람은 오로지 복수를 위해 견뎠고 나는 배구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견뎠다. 그 괴로움은 내 스스로 시작과 끝을 정하는 게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작된 것이고 아마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장날 테다. 우리의 최종장은 갈필로 휘갈긴 그림일 테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예정하고 있는 아픔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고통의 대가로서 나는 무결하게 코트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내 불순한 열망을 누구는 알아본 것 같다. 선배들 중 나를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신입생 시절에도 겪었던 일이었다. 열등감을 다스리지 못해 신예에게 화풀이하는 놈들. 나는 대학에 와서도 종종 웃기지도 않는 얼차려를 당해야 했고 재수없다느니 잘난 척하지 말라느니 하는 말을 면전에서 들었다. 억울했다. 날고 긴다는 놈들이 모이는 학교인데 왜 표적은 내가 되어야 했는가. 반반한 내 얼굴이 녀석들 비위를 거슬렀을 것이다. 나만이 눈치채도록 은근히 따돌리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캐비닛에 이상한 걸 뿌려놓는다든지 신발을 훔쳐간다든지. 그 정도 수준인 녀석들이었다. 그게 그 녀석들의 깜냥이란 거겠지. 비웃음도 아까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겐 당해줄 맷집이 있었다. 저항해볼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순진하게 당해줄 필요는 없다. 난 내가 저지를 일에 책임질 수 있었다.
“.........”
한 대 얻어맞은 후에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문제였지. 난 너무 물러서 탈이었다. 체육관 천장이 올려다보였다.
“새끼, 누가 보면 몇 대 맞은 줄 알겠다?”
키들키들. 듣기 싫은 목소리들이 머리위로 뚝뚝 떨어진다. 옆구리에서 통증이 번지기 시작해 숨이 막혔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으고 등을 구부린다. 맞은 델 또 때리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어디 촌구석에서 굴러먹다 온지 모르지만 말야. 너 너무 나대지 마라, 어?”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다. 그 말을 해놓고 놈들은 낄낄거렸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쿨럭, 운동선수가 무식하단 소릴 듣는 거야......”
기어이 나는 목소리에 힘을 준다. 높은 체육관 조명을 등지고 내려다보는 녀석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녀석들의 심기를 제대로 거스른 거다. 개중 한 놈이 내가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감싸고 있는 걸 눈치챘다. 곧 구타가 이어졌다. 어떻게 했어야 옳았을까.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놈들이 체육관을 떠나는 걸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맞은 곳은 상반신인데 온몸이 욱신거렸다. 동기들에게 물으면 놈들이 평소 어떤 소문을 달고있는지 알 것만 같다. 사람 때리는 법에 익숙한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그 방법도 교묘했다. 거울 앞에서 확인했더니 놈들은 노출되는 부위를 피해 솜씨좋게도 때려놨다. 얼굴과 팔다리는 멀쩡한 것이다. 구타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막느라고 잘못 맞은 오른손 손날이 부어 있었다. 하필이면 공에 맞아 찢어진 부위에 염좌까지 겹쳐졌다. 이런 건 부상이라고 하기에도 억울하다. 어쩔까, 그 자식들을.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다가 가방을 집어들었다.
공기를 맹렬히 태웠던 열기가 교정에 착 가라앉아 있다. 해질녘의 고요한 공기가 더해져 다른 의미로 숨이 턱 막힌다. 체육관 문을 잠근 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은 다 먹었다.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체육관을 나오는 길목에서 너와 마주친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정말이지 재수없는 하루다. 너는 나를 발견하곤 부르려는 듯 입을 떼었다. 나는 그러나 주머니 깊이 손을 쑤셔넣고 바닥을 보며 걷는다. 네가 나를 쫓아오지 못하도록 빠른 걸음으로. 잰걸음에는 말할 기분 아니니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네게서 멀어진다. 다시 한 번 네게서 도망친다.
발길질 몇 번 당했다고 해서 무너질 일상이 아니다. 내 일상은 그 정도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거였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스케줄을 소화했다. 수업은 빠지지 않았고 강도 높은 훈련도 마다않았다. 다만 오른손은 부은 즉시 병원에 가서 처치받고 약을 탄 후 통원치료를 받았다. 제때에 약을 먹고 찜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를 쓰고 회복하려 애썼다. 스파이크는 물론 블로킹하기엔 무리였지만 세터로서의 나는 완벽했다. 그 녀석들이 내 배구를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너희가 흔들 수 있을 만큼 약하지 않다고 말이다.
마침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연습은 빨리 끝났다. 선배 몇이 우리에게 저녁을 사주겠노라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개중에 나를 때렸던 놈들이 섞여있었던 까닭이다. 웃는 낯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하자 그 녀석은 비열하게 씩 웃었다. 그럼 그래야지, 하는 표정. 발길질 몇 번 한 것으로 개를 길들였다고 착각하는 부류였다. 녀석은 자신이 개에게 단단히 공포를 가르쳤다고 믿고 있으므로 그 개가 다리를 물어뜯을 것이라곤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려나, 선배들과의 친목에까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간다는 사람들과 집에 간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체육관에 남아 스파이크 연습을 했다. 네트 건너편에 물병을 세워놓고 타점을 정확하게 맞추는 연습이었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 운동화와 바닥이 끼긱거리며 마찰하는 소리와 팡 하는 공의 파열음은 세상 무엇보다 듣기좋은 음악이다.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에는 공밖에 보이지 않았고, 난 그렇게 흠뻑 빠져드는 순간을 사랑했다. 공은 그러나 종잡을 수 없는 내 마음처럼 코트 바깥으로 튀었다. 코스가 조금씩 빗나가는 것이다. 그럴수록 공에 들어가는 힘이 세어졌다. 어느새 나는 연습 아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코스가 엉망이다, 오이카와.”
짜증스레 손목을 털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난 가망없게도 네가 아니길 바라며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너는 문간에서 나를 지켜보았던 듯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고, 내가 무어라 말하면 꺼져줄지 생각하는 동안 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너는 가방을 도로 내려놓고 져지 외투를 벗는다.
“왜 돌아왔어? 우시와카는 집에나 가.”
“스파이커 없이 무슨 연습을 하겠다고.”
투덜거리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말이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너는 자리에 앉아 가방을 연다. 운동화를 갈아신고 끈을 질끈 묶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스파이크 연습은 됐어. 토스 올려줘.”
마지못해 나는 그렇게 말한다. 결국 우린 하늘이 검게 물들 때까지 추가연습을 했다. 토스가 높다느니 코스를 안쪽으로 바꿔보라느니 하는 말을 제외하고 사적인 대화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너와의 관계는 그 정도로 족했다. 내 감정과 배구가 완전히 양립할 순 없다면 이런 상태도 썩 나쁘지 않은 것이다.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이 정도 거리가 좋았는데.
“샤워는 안 할 건가?”
라커룸에서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며 미적거리고 있으니 네가 묻는다. 너는 체육관 정리를 끝내자마자 덥다면서 상의를 훌렁 벗었고 나는 네 쪽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무심하기도 하지. 가끔씩 네가 옷을 벗을 때마다 뭐라고 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나는 노력해야 한다. 내가 네 몸을 생각하며 뭘 하는지 알고싶지 않다면 제대로 옷 입으라고 할 수 없진 않은가. 나는 네 몸을 보는 것도, 내 몸을 보여주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궁리했지만 적당한 거짓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벗은 네 몸을 흘끗 보며 나는 씩 웃는다.
“와카쨩한테 내 몸 보여주기 싫은데.”
“......그럼 얼른 씻고 나올게.”
너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지만 나를 두고 샤워장으로 들어간다. 샤워장에 물 트는 소리가 울리자 나는 안심하고 옷을 벗는다. 세면대에서 타월을 적셔 땀을 훔치고 있으려니 이 처지가 그저 우습기만 하다. 너로 인해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신경쓰고 있는데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초부터 그리고 최후까지 미움으로 감추기로 한 감정이었다. 난 고통스런 짝사랑밖에 알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으므로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내가 자조하는 것만큼 감정을 덜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허리와 가슴통을 푸르스름하게 뒤덮고있던 멍은 이제 시커먼 색이 되어 있었다. 멍이 들었다가 빠지는 과정에서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래도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고동색은 섬뜩한 구석이 있다. 오전에도 병원을 다녀왔었는데 멍에는 별다른 특효약이 없다. 그저 시간이 흔적을 지워주길 기다릴 수밖에. 앞으로도 한동안 내 몸뚱이는 알록달록한 도화지일 것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서 멍이 노랗게 된다면 그때에는 혹여 상처가 드러나지 않을까 조심하지 않아도 되겠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부위들이었지만 그래도 철저히 숨기려고 했었다. 손도 천천히 낫고 있다. 거울에 몸 이곳저곳을 비춰보고 있는데, 문득 샤워장에서 물소리가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하기도 전에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
샤워실 문간에 토끼눈을 한 네가 서 있다. 주섬주섬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너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방심한 것에 대해 탄식할 겨를도 없었다. 차마 너를 보지 못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저리 가란 말이야, 하고 말하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무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눈치도 없는 너는 기어이 내 앞에 우뚝 선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내 팔을 쥐고 내 몸 곳곳을 훑어본다. 경악했던 네 얼굴이 삽시간에 지독히도 어두워졌다. 이제 네가 추궁할 차례다.
“누군가?”
“.........”
“이렇게 만든 놈들이 누구냐고.”
“.........”
“오이카와!”
네가 큰소리를 내는 건 너를 알아온 시간 중 처음 있는 일이다. 너는 내 팔을 쥐고 채근하고, 나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네게서 팔을 빼내려 한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좀 굴러서...!”
“3학년들이지? 노란 머리 녀석들.”
가끔씩 너는 무서운 육감을 가졌단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노란 머리 녀석들이 정말로 평판이 더러워서 너마저도 경계하고 있었거나. 지금은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꼼짝없이 네게 붙잡혀서는 도저히 너를 미워할 수 없다. 나는 지친 낯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피곤해. 그냥 쉬게 해줘.”
“.........”
주장에게 상담하라느니, 그렇지않으면 제가 코치에게 말하겠다느니 줄줄이 훈계할 줄 알았던 너는 그러나 말이 없다. 불의를 그냥 보아넘기는 성격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남의 불의도 아니고 내 불의인데 가만히 있을 줄이야. 의외라면 의외였다. 네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니 나는 벤치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렇게 숨기려고 용을 썼는데 어이없이 들통났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그간의 내 노력이 다 헛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힘이 쭉 빠졌다.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그냥 여기서 잠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두 주먹을 꽉 쥐고있는 너를 흘끗 본다. 네가 곁으로 와서 앉는다. 늘 네게서 나곤 했던 바디워시 향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상해서 물을 끼얹다 말고 다시 나온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싫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었나?”
일단 옷부터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너는 물기를 대강 훔치고 바지와 셔츠를 걸쳤다. 도로 옆에 앉아서도 한참 만에 네가 꺼낸 말은 그것이다. 물론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 자식들 때려눕히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상황은 한층 복잡해진다. 놈들은 몇 년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선배고 나는 신입생이다. 놈들은 내가 이 학교에 오는 데 무엇 하나 보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학교에 내 편보단 놈의 편이 더 많지 않겠는가. 나는 벌써부터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배구에만 전념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들을 말하고 설명할 기운이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기 싫다는 의사를 표했다. 네가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했으면 하나?”
“......몰라. 일단 오늘은 좀 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로 걱정하듯 내 이마를 짚어보기까지 했으나 열 같은 건 없었다. 네 손바닥이 다가올 땐 그만 눈을 감았다. 아주 잠시간의 찰나였지만. 다시 눈을 뜨며 나는 막 떠오른 생각을 네게 이야기했다.
“잠깐만 무릎 빌려줄래?”
되든 안 되든, 이젠 아무래도 좋겠다고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너는 무릎을 툭 쳤다. 입을 딱 벌린 쪽은 나였다.
“진짜로?”
“장난으로 보이나?”
“나 웃기지 마. 옆구리 아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허리께를 문지르는데 너는 그러나 한없이 진지하기만 하다. 너는 그게 진심인 것이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네 무릎을 내려다본다. 네가 내 붉어진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 나는 네 무릎을 베고 누웠다. 눈이 마주치면 민망하니까 마른타월로 얼굴을 덮고서. 네 무릎은 좋은 말로라도 베기에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딱딱하고 높았지만 나는 아무런 불평도 토할 수 없다. 그냥 가. 가란 말이야. 날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리라고. 끝내 목이 메어 말을 삼키고 만다. 내 고통이 끝나지 않는 건 내가 이렇게 물러터졌기 때문이리라. 너에 관한 것이라면 모질게 끊어내질 못하는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감정을 복기하면서도 결국 내가 느끼는 건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의 것인, 그러므로 내가 주인일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네 앞에선 늘 새롭게 거듭났다. 미움의 끝은 사랑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널 미워하길 그만뒀을 무렵부터 내 짝사랑은 끝을 모른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름이 결국 꺾이듯이 내 사랑도 결국 꺾이겠지. 영원히 불타는 여름은 없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타월 아래에서 난 울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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