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통화목록에서 낯선 이름을 발견한 일이었다. ‘에이전시’. 우시지마의 침대에 엎드려있던 오이카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입단 제안이 들어왔나? 오이카와는 놀라워하며 즉시 우시지마에게 물었다.
“와카쨩 이거 뭐야?”
과제에 집중하던 우시지마가 등 너머로 오이카와를 보았다. 우시지마 얼굴이 잠시 당황으로 굳었지만 그는 바로 대꾸했다.
“별 거 아냐. 이미 정리된 일이다.”
너무나 대수롭지 않은 듯 반응하는 것에 오이카와는 잠시 벙쪘다. 누가 보면 어젯밤 뭐 먹었냐고 물어본 줄 알겠네. 오이카와의 육감은, 우시지마의 반응과 꼭 정반대로 이 일이 결코 별 것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한 걸음에 우시지마의 책상 앞으로 갔다. 그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우시지마의 노트북을 탁 덮었다.
“우시지마.”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입이 굳게 닫히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거 봐라? 오이카와 역시 급격히 표정을 굳혔다.
“뭐가 정리돼? 무슨 일이었는데?”
“......클럽에서 스카우터가 왔다.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고. 그게 다야.”
우시지마가 설명했다.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왜 미간을 좁히는 쪽이 우시와카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오이카와는 벌써부터 기분이 나빠졌다. 핸드폰 액정에 떠 있는 에이전시는 오이카와 역시 이름을 익히 아는 곳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하면 이름깨나 있는 구단일 텐데. 해외리그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차다니 제정신인가? 오이카와와 우시지마의 최종목표는 국가대표지만, 도중에 해외리그로 진출할 가능성도 당연히 상상해봤다. 해외 구단에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나 우시지마가 그 기회를 찼다는 것보다 충격적인 건,
“어떻게 말 한 마디 안 할 수 있어?”
입단제의가 오가는 동안 저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점이다. 오이카와로서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배신감이었다. 둘은 같은 대학의 배구팀이었고, 세터와 윙스파이커였다. 중고교시절을 라이벌로 지냈고 대학에 와선 동거하는 애인사이가 되었다. 우시지마와의 연애에는 나름대로 곡절이 있었지만, 서로 신뢰를 저버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있었는데 결정이 다 끝난 뒤에 별 일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 어느 나라 연애법인가? 오이카와는 어디서부터 따져야할지 알 수 없었다. 우시지마는 그러나 피곤하다는 듯 오이카와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시지마가 에이전시의 번호를 지워버리는 모습. 오이카와가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우시지마는 영원히 숨겼을 거다. 우시지마는 그러고도 남았다. 오이카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변명이라도 해 봐.”
제 목소리가 이토록 낮아질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는 오이카와였다. 우시지마는 묵묵부답으로 대꾸했다.
“알겠어.”
그래서 오이카와가 대답했다. 그는 문을 쾅 닫고 기숙사를 나가버렸다. 동기에게 연락해 술자리에 끼었다. 동기들은 왜 오늘은 우시지마가 없느냐고 물었다. 맨날 데리고 다니더니 왜 오늘은 혼자이냐고. 일이 좀 있어서 싸웠다고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별일이네. 보통은 네가 화내고 우시지마가 ‘그건 아니다 오이카와’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어?”
평소엔 그랬지. 그렇긴 했는데, 이번엔 평소와 경우가 달랐다.
그날 오이카와가 바깥을 쏘다니다가 새벽에 돌아왔을 때, 우시지마는 태평히 잠들어있었다. 오이카와는 어둠 속에서 침대를 더듬으며 재차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이해해보려 했는데. 아무리 크게 싸워도 날 안 기다린 적은 없었는데.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화풀이를 했고,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무시로 일관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무슨 말을 해도 마땅한 대꾸가 없는 것이다. 오이카와가 며칠을 내리 화내도 변명 한 마디 없었다.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앞서 걷는 우시지마의 어깨를 잡아 난폭하게 돌려세웠다.
“너 때문에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아.”
“그만해라. 이제 와서 따진다고 바뀌는 건 없어.”
“너한테 나는 투명인간이었나 보지?”
폭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시지마가 왜 미묘하게 화를 내고 있는지 오이카와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서로를 향한 분노의 감정은 차곡차곡 쌓여 두 사람의 발화점까지 질주했다. 두 사람의 폭발점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도 해본 일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곧 머지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일상이 위태로우니 연습경기에까지 영향이 미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드링크 병을 퉁명스레 던졌으며 자주 미스했다. 연습경기가 삐거덕거렸다. 일상이 엉망일지언정 배구만은 무결해야 했는데. 오이카와는 제가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았으나,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집중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공은 엉뚱한 곳으로 엇나갔고 급기야는 네트 정가운데로 서브를 꽂아넣었다. 그 다음, 우시지마에게 올리는 공도 코스가 엉망이었다.
펑!!
코트 분위기는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오이카와의 형편없는 코스 때문이 아니었다. 우시지마가 그 공을 주먹으로 쳐서 건너편 벽에다 메다꽂은 게 문제였지.
“.........”
부원들 모두가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시선.
“우시-”
“장난하나 오이카와?”
주장의 말허리를 자르고 우시지마가 큰소리를 냈다. 우시지마의 낮은 목소리 한 마디는, 그렇잖아도 가라앉은 코트 분위기를 거의 무시무시하게 만들었다. 오이카와가 울컥하여 대답했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오이카와 역시 사나운 얼굴로 바뀌어 우시지마에게로 척척 걸어갔다. 우시지마가 어디 붙어보자는 듯 오이카와에게로 한 걸음 옮겼다. 주위에서 동기와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서로를 박살낼 기세로 걸어오는 세터와 윙스파이커를.
발화점을 넘겼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주장은 두 사람을 코트에서 쫓아냈다. 오이카와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연습경기를 완전히 죽 쒀놨다는 사실 말고도 오이카와를 괴롭게 한 건, 우시지마의 태도였다. 딴생각 하다 실수한 사람에게 그렇게 난폭하게 화낼 일인가? 물론 오이카와가 정말 잘못하긴 했지만, 빌미는 우시지마가 제공하지 않았나. 억울하기도 하고 아직 정신이 없을 만큼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그 실수를 진심이라 생각했을까. 나를 그렇게 몰랐을까, 우시지마는.
하늘이 끄물거렸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우시지마 얼굴을 볼 것이 뻔했기 때문에, 오이카와는 아예 외박을 할 각오로 바깥을 쏘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가 기숙사에 돌아간 건 새벽 세 시가 넘은 때였다. 핸드폰엔 연락 한 통 와 있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기숙사 문을 열었다. 만약 저번처럼 우시지마가 태평히 잠이나 자고 있다면, 때려서라도 깨워서 결판을 볼 생각이었다. 오이카와를 맞이한 것은 그러나 차가운 어둠뿐이었다. 우시지마는 기숙사에 없었다. 그는 늘 오이카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하곤 했다. 잠은 꼭 기숙사 와서 자라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도 화난 티를 내겠다 이거지. 오이카와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맞은편에 있는 우시지마의 잘 정돈된 침대를 노려보았다.
“.........”
그래도 우시지마, 진짜 너무한 건 너 아니야? 우린 사귀는 사이잖아. 네가 사귀자고 했잖아. 그간 분노로 위장했던 비참함이 마구 밀려들었다. 그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오이카와는 그들의 시간을 회고해보았다. 미야기의 시간과 도쿄의 시간들. 무뚝뚝하고 서툰 우시지마에게 적응하느라 꽤나 애먹었다. 그래도 기꺼운 시간들이었다. 이젠 우시지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벽 네 시, 여전히 연락은 없고. 우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는지도 모른다.
우시지마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던 시간이 더 길다. 중고교 내내 우시지마를 봐왔고, 끝끝내 그를 이기지 못했다. 오이카와의 배구는 우시지마라는 벽에 수 차례나 부딪쳤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천적이라는 사실 이외에,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오이카와의 배구는 우시지마가 전부가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길의 중간에서 성가시게 오이카와를 가로막는 존재일 뿐이었다.
우시지마와 같은 학교에 수험을 친 것은 오이카와의 오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배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장소를 바꾼 것뿐이다. 우시지마의 반대편에서 같은 편으로. 같은 네트 안쪽으로. 오이카와가 증명해야 하는 건 자신의 배구였지, 우시지마에 대한 우월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이카와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대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런 건 오이카와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배구 하나만 보고 달렸다. 둘은 대학에서 재회했다. 윙스파이커와 세터였다. 우시지마가 기뻐했다. 그는 늘 오이카와를 응시했다. 코트 위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라인 바깥에서도 똑같이.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강의실이었다. 할아버지 교수님의 단조로운 목소리는 수강생들을 꾸벅꾸벅 졸게 했다. 아직 에어컨을 작동할 시기는 아니어서 강의실 창문을 시원하게 열어두었다. 열린 창에서 미지근한 듯 시원한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이카와는 바람이 실어오는 여름냄새를 느끼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얼마나 잤을까. 긴장을 풀지 않았던 터라 머잖아 움찔 놀라며 깨어났다.
그리고 우시지마와 눈이 마주쳤고.
오이카와가 또 교재를 깜박한 바람에 우시지마 옆에서 책을 나눠보던 날이었다. 우시지마는 자주 교재를 빠뜨렸고 그때마다 오이카와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오이카와는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책을 빌려주었는데, 우시지마가 대신해서 필기해주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자다가 딱 눈이 마주치자 우시지마는 시선을 미끄러뜨려 교재를 응시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갔다. 교재엔 인쇄된 활자 외에는 낙서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다시 우시지마를 보았다. 오이카와는 이제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고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와카쨩, 다 티난다.”
모를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가 딴청피운다는 사실쯤은. 그리고 오이카와가 정답을 말했다는 듯 우시지마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오히려 오이카와가 당황하며 그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진짜야?”
거의 확신했고, 진심으로 떠봤던 것이지만 말이다.
수업이 끝나고 그들은 초록으로 물든 교정을 걸었다. 그냥 말없이 그늘 속을 걸었다. 그 어색하고 어딘가 낯간지러운 기류 속에서 오이카와는 그들의 시간을 소회했다. 세이죠와 경기한 후엔 꼭 오이카와를 기다리던 우시지마. 싫은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우시지마는 꿋꿋하게 말을 건네었다. 너는 내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해. 넌 우리 학교에 왔어야 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 속을 긁어놓기가 일쑤였지만, 그 의미를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그건 오이카와와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우시지마는 늘 오이카와를 보고싶어 했던 것 같다. 우시지마가 자꾸 교재를 빼먹는 건 고의일 테다. 우시지마가 그간 오이카와에게 알려주었던 가능성이란, 배구에 대한 것도 있었고 감정에 대한 것도 있었다. 예컨대 오이카와를 얼만큼 승부욕에 불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우시지마와의 시간을 소회한 직후, 오이카와에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어쩌면 너로 인해 설렐 수도 있다는 가능성. 얼떨떨한 기분에 오이카와는 한동안 휩싸여있었다. 이걸 그대로 인정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름에 牛자가 들어가서일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고백했다. 어쩌면 이때가 아니라면 기회가 또 없으리라고 느낀 듯이.
“너와 교제하고 싶다.”
“............난 잘 모르겠는데.”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오이카와의 길지 않은 인생, 한두 번 고백받아본 것도 아니고 고백을 거절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피해본 적은 없었다. 친구처럼 여상하게 지내면 지냈지 오이카와가 나서서 어색함을 느껴본 적 없는 것이다. 고백은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던 오이카와였다. 그랬던 것이 무색하게 그는 며칠 우시지마를 피했다. 그 고백 멘트부터가 낯설었다. 교제라는 건 부모님 세대나 쓰는 단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눈을 마주치고 담담히 고백하는 우시지마라니. 복기하면 복기할수록 설렜다. 아마도 너무나 뜻밖의 모습을 보아 당황했던 여파일 것이다. 며칠 지나면 정리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아직도 뛰는 것 같은 가슴을 달랬다. 문제는 둘이 룸메이트란 사실이었다.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이카와는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기숙사에 늦게 들어가거나 아침일찍 방을 나섰다. 우시지마를 너무 의식하지 않는 범위에서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다. 시라토리자와와 붙어서 졌을 때에도 늘 우시지마를 똑바로 쳐다보던 오이카와였는데.
“나 때문은 아니지?”
토요일 아침 여섯 시에도 로드워크를 나간다고 준비하던 오이카와가 정곡을 찔렀다.
“무,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가든지.”
“......나는 됐어.”
말하며 우시지마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기숙사 문을 닫자마자 오이카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우시지마를 피하고 있다니 오이카와도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저답지 않은 회피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말로 우시지마 눈을 못 보겠는 것을. 우시지마는 그냥 평소의 우시지마 그대로였고 오이카와만 그 녀석을 의식하느라 난리였다. 우시지마에겐 왜 ‘평소처럼’이 안 되는 걸까.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그에게 쏘다닐 곳이란 거기서 거기였다. 운동하러 가거나 동기 방에 놀러가거나 술자리를 전전하거나. 오이카와가 그날 술자리를 기웃거리다가 자정 넘어 들어갔을 때, 기숙사 문을 열자마자 우시지마와 딱 마주쳤다. 그는 막 바깥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어? 어디 가게?”
“......아니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대답하며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상했다. 점퍼에 러닝화에, 핸드폰까지 쥔 모양이 꼭 외출차림인데. 오이카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폰을 들여다봤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있었다. 우시지마. 그는 오이카와를 찾으러 나가려던 것이다.
“우시와카...”
오이카와는 중요한 걸 깨달았다는 얼굴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그가 직시하지 않았던 우시지마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간이었다. 우시지마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은 아니니까. 우시지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곧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했다. 오이카와는 오히려 조금 긴장해서 굳어졌다. 우시지마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붙였다.
“요즘 나를 피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건 너 때문이라니까.
“불편하다면 내가 비켜주겠다. 사감에게 말해서 방을 옮겨달라고 할게.”
결코 그런 걸 바랐던 건 아니다. 오이카와는 당장 우시지마에게 아무런 확답을 못 주어도 그건 맹세할 수 있었다.
“아니 난,”
“그러니까 피해다니지 마. 수업에서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연습 중에도... 되도록이면 피해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래도.”
오이카와가 다급히 대꾸했다. 우시지마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그러니까 그게.”
“말을 정확하게 해줘 오이카와.”
“......그, 아직 너를 찬 건 아니야. 싫다고는 안 했잖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오이카와가 고백했다. 제가 듣기에도 너무나 비겁해서 오이카와는 머리를 박고 싶었다.
“.........”
오이카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우시지마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당한 줄로 알아들었는데.”
“......진짜 싫으면 싫다고 했겠지. 우시와카, 날 그렇게 몰라?”
비겁한 말은 한번 터지니 계속해서 줄줄 나온다. 스스로도 기가 차서 뺨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시지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결국 오이카와는 어깨를 쭉 늘어뜨렸다.
“아 미안해. 미안하다고.”
“뭐가.”
이젠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추궁하고 있었다. 천하의 우시지마가 왜 이런 순간에 섬세한지 웃기는 노릇이지만,
“우유부단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결국 오이카와는 승복했다. 우시지마에게 사과했다. 그래서 네 결론은 어떻다는 거지? 묻는 얼굴로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봤다. 오이카와는 이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우시지마 옆 빈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을 마구 문지르는 그를 우시지마가 뚫어져라 보았다. 전부 느낄 수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우시지마의 기대감. 오이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백했다.
“네가 싫지 않다고.”
가끔 네게 설렐 때가 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네 생각을 하고있는 시간이 꽤 많더라고. 우시지마는 참 고단수였다. 이 오이카와 님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다니 말이다. 오이카와의 기력이 쭉 빠져나갔다.
“그래서 이제-”
“나랑 사귀자고.”
연애의 시작이었다.
인정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결국 우시지마에게 승복했던 밤이 지나고 오이카와는 다시 우시지마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우시지마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여태까지는 친구로서였지만, 우시지마와 연애 좀 해볼 수도 있지. 오이카와는 한창 형태를 갖춰가는 마음이라도 시작으로 삼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 마음이 완성되겠지. 공백은 차차 메워가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꽤 오래 사귀고 있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자주 감탄했다. 늘 티격태격하는 것 같아도 싸움 한번 없이 잘 지내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들은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의 불평불만을 잘 받아준 덕이라고 말했고, 오이카와도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우시지마가 잘 받아주는 성격이라는 건 옳았으니까. 우시지마가 저에게는 관대하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언젠가 오이카와가 자기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었을 때, 우시지마는 한참동안이나 침묵했다.
“.........슬슬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할지 고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엄청나게 설렌단 말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느끼하다고 어깨를 퍽퍽 쳤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심장이 다 얼얼했다.
우시지마가 먼저 시작한 연애였지만, 오이카와 역시 그 마음에 젖어들었다. 둘 사이에 연애라는 단어가 교환되면서부터 감정에 가속도가 붙었다. 어느덧 오이카와의 마음은 한결같이 우시지마를 향하여 흘렀다. 우시지마를 좋아했다. 연애의 핵심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므로, 그것만 있느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사이의 균열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어디서부터 어긋하기 시작한 걸까? 왜 우린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를 지경까지 갔나. 발화점이 높은 우시지마였지만 일단 거기에 다다르자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늘 일방적이었던 오이카와의 불평이 우시지마의 것과 충돌했다. 두 사람 모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포악해질 수 있음을, 둘은 얼마든 서로를 파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오이카와는 빈 기숙사에서 우시지마를 기다렸다.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우시지마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희붐한 빛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시지마가 눈을 피하며 실내화로 갈아신었다. 그는 한 마디 말없이 외투를 벗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오이카와에게서 등지고 벽을 바라본 채로. 대화하기 싫다는 뜻이겠지. 오이카와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와카.”
“.........”
“에이전시... 왜 말 안했는지 설명 안 해줄 거야?”
“.........”
“알았어.”
그래서 오이카와도 자리에 누워버렸다. 우시지마에게서 등지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건너오는 우시지마의 깊은 숨소리. 그 소릴 듣고 있으면 전부 괜찮아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던 때가 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우린 사랑하고 있으므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착각 말이다. 나는 너를 이해하나? 우린 진정 서로를 이해하나? 어느새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문제였는지도 몰라. 좋으면 됐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 이 파국을 초래한 것이다. 아무리 연인지간이라도 그저 좋다는 감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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