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소재 有
S U M M E R T I M E S A D N E S S
아무도 없는 라커룸에서 오랫동안 네 무릎을 베고 누워있었다. 내가 울지 않기 위해 애쓰는 동안 너는 단지 충실하게 무릎을 내어주었고 나는 네가 조금 덜 친절하길 바랐다. 그러나 네가 모질었다면, 그리하여 내게 경멸어린 시선을 비쳤다면 내 마음은 산산조각났겠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흩어질 수 있는 내 마음이 아직까지 건사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허락한 그늘에서 너를 미워하고 사랑한다. 네 무릎을 베고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는 데엔 거의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했고 나는 그것만으로 탈진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너와 함께 있기만 하는 일에도 감정은 끔찍하게 소모되었다. 고통도 사랑도 불 끄듯이 끌 수 있는 것이라면 좋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마음은 장애물을 멀리 에둘러 가는 편을 선택했다. 기실 내 짝사랑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너는 기어이 자취방까지 따라왔다.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혼자 두라고 절규하듯 하는 내 말에도 너는 아랑곳않고 옆을 걸었다. 모양도 색깔도 같은 스포츠백 두 개가 네 어깨에서 흔들렸다. 그 어깨를 밀치며 저리 꺼지라고 패악을 부리기엔 나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감정의 흐름에 따라 마땅히 배출되었어야 할 눈물은 그러나 속안에 고여있는 그대로였다. 다음 모퉁이가 지나면, 아니 이 다음 횡단보도에 닿으면 그때에는 너에게 그만 가라고 말해야지. 그러나 말을 하면 울음까지 왈칵 터져나올 것 같은 기분이 여전했다. 결국 나는 너에게 말을 하지 못했고 지독하게 피곤한 몸으로 너와 귀가해야 했다. 맨션 앞에 도착했을 때, 네 손엔 짐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운동선수가 끼니를 거르는 일이 어디 있느냐며 저녁거리까지 산 것이다. 불공평했다. 각자 소모한 감정의 양이 다른데 실랑이가 될 리 없었다. 두통이 나를 괴롭혔다. 도어락을 열면서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들었다. 대학 동기를 집에 들이는 데 각오씩이나 필요한 내 마음은 보듬어진 역사가 없었다.
사촌누나가 직장을 옮기면서 처분하려던 맨션에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시내에서 너무 외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는데다 누나가 내내 깔끔을 떨며 관리한 곳이다. 방 하나에 욕실 하나 있는 집은 들어서자마자 바로 침대가 보이지만 단정한 인상을 준다. 아직 동기 중 아무도 이 집에 들어와본 적이 없었다. 이와이즈미 녀석도 못 와본 내 첫 자취방에 네가 먼저 와보는 것이다. 물론 굳이 너에게 알려줄 필요 없는 사실이었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트는 동안, 너는 손부터 씻고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씻고 나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잠깐만, 오이카와.”
욕실로 도망치려는 나를 네가 잡아세운다. 조금 긴장하여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으니 네가 인상을 찌푸린다.
“보여줘. 몸.”
“......아까 봤잖아.”
“다시 확인해야겠다.”
너는 고집스레 나를 내려다본다. 찰나간에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따져보았다. 순순히 네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상황을 끝내든지, 나에게도 고집이 있음을 내세워 거부하든지. 그러나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네 시선을 받으며 나는 빠르게 승복했다. 셔츠자락을 쥐고 가슴까지 걷어올려 적나라한 몸을 보여주었다. 잠시 네 얼굴 위에 복잡스런 감정들이 뒤엉켰다.
“자. 됐지.”
이걸로 끝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네가 무어라 첨언하기 전에 곧장 욕실로 들어간다.
차가운 물줄기부터 틀어놓고 거울 앞에 섰다. 벌거벗은 내 몸을 들여다본다. 우두커니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본다.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너는 문 건너편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 나는 욕실에서 벗은 몸이 되어있다. 내 몸은 너에 비하자면 한참 무르고, 섬뜩한 빛깔로 멍져있기까지 하다. 라커룸에서 보았던 단단하고 미끈한 너의 몸이 생각난다. 네 육체에 대한 생각은 한동안 나를 죄책감에 휩싸이게 하겠지. 같은 팀 선수끼리 몸을 보이는 일이 뭐가 대수라고 욕정이 이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단숨에 차오르는 성욕은 내 번뇌의 불꽃인 것만 같다. 뜨겁고 불순해서 꺼뜨리지 않으면 그것에 잠식될 것만 같다. 물줄기 속으로 들어가 정수리에 찬물을 맞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피를 식힐 때까지 그저 물줄기를 맞으며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거울 건너편의 얼굴과 벌거벗은 몸을 들여다봤다. 이 나른한 표정과 붉어진 목과 귀와 뺨이 뭘 의미하는지, 네가 본다면 전부 눈치챌 것이다. 그때의 네 표정을 상상하며 열을 식혔다.
욕실에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내가 자리를 피한 동안 너는 부엌에서 식기를 꺼내어 저녁 먹을 준비를 해놓은 참이었다. 저녁으로 사온 죽을 냄비에 올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고 바닥에 상을 펼쳐 그릇이며 수저 따위를 차려놓았다. 내가 나오자마자 너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죽이 데워지길 기다리며 너는 침대 머리맡의 선반을 가리켰다. 네 손끝에는 내 중학시절의 추억이 걸려있었다. 미야기 베스트 세터 상. 키타가와 제1중학교 오이카와 토오루.
“아, 저거.”
“수여식 때 네 모습이 생각난다. 굉장하게 울었지.”
“남의 상처 건드리기야? 그 상처 만든 게 누구신데.”
“...계속 너를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이 나.”
“그때 얕보이는 게 아니었어. 그랬으면 네가 3년 내내 시라토리자와 타령하는 소릴 안 들어도 됐을 텐데.”
“널 얕봐서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너를 원했어.”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세상에 세터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미야기에선 너뿐이었다.”
“하지만 도쿄에선 아니잖아?”
“.........”
정곡을 찔렀는지 너는 말을 줄이며 생각에 잠긴다. 그래,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쩌면 너조차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지. 네가 나를 원할 이유가 이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도쿄의 체대고 세터 후보는 줄을 서야 할 정도니까. 나는 드라이어를 들어 머리를 말린다. 냄비뚜껑이 덜컹이는 소리가 나자 너는 불을 끄고 냄비를 옮긴다.
메뉴는 게살을 넣어 끓인 죽이다. 쌀과 달걀과 게살을 푹 끓여 짭짤하게 간을 맞춘 음식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부드러웠고 따뜻한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돌았다. 그제야 요 며칠간 제대로 식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른다. 욱신거리는 고통 탓에 음식 생각이 잘 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너는 내 그릇에 죽을 얼마간 덜어주고 너의 그릇을 채운다. 입안에 조금 떠넣으니 쌀알이 혀에서 부드럽게 뭉개졌다. 몇 입을 더 떠넣는다. 굽이친 속이 두루 편안해지는 맛이었다. 뱃속이 금세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만족감이 허기보다 먼저 배를 채웠다. 마주앉은 너는 내가 먹는 양을 지켜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우린 죽 한 대접을 나눠먹었고 먹는 동안에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얼마간 위가 차자 더는 못 받아들이겠다는 듯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너무 조금 먹었다.”
“나머지는 내일.”
그러니 더는 채근하지 않는다. 네가 고집하던 대로 함께 귀가해서 저녁까지 먹었다. 너는 내가 욕실에서 뭘 했는지 모른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네가 이 공간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더는 없는 것이다. 식기를 설거지통에 밀어넣자마자 너에게 말한다.
“가자, 이 앞까지 바래다줄게.”
왜 네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지만.
꿈같은 몇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꿈같이 환상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지만 순간순간 느끼는 감각은 너무나 생생해서 역설 속에 갇혀있는 것 같고, 평소에는 상상하지 않았던 낯섦이 언제 끝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그 상황에서 죽어라 벗어나고 싶어하는 한편 그 상황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양립하는 것이다. 위로와 혐오를 동시에 느꼈다. 증오와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 한밤중이라 해도 공기중의 뜨거운 열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씻고 나온 것이 무색하게 바깥에 나오자마자 땀이 들었다. 문득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너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읽는다. 타케우치. 내 몸을 엉망으로 만든 선배의 이름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두운 허공에서 마주친다. 너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는다.
“네.”
무어라고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술집에서 전화를 걸었는지 왁자한 소음이 배경에 깔려있다. 너를 응시했더니 네가 핸드폰을 붙든 채 시선을 마주쳐왔다.
“집인데요. 네. ......아뇨.”
무뚝뚝하다 못해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목소리로 너는 대꾸한다. 쓸데없이 너를 술자리에 불러내는 전화일 것이다. 네가 누군가에게 짜증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점점 네 미간이 좁혀지고 너는 귀에서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렸다. 너는 선배가 얼마간 떠들도록 놔두다가 네, 그럼. 하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한다.
“오이카와. 이번 일, 감독님에게 말할 거다.”
“......운동부에서 이런 일 처음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말 안 하겠다면 내가 할게.”
“말해도 내가 말해. 이건 내 커리어가 걸린 문제야.”
“경찰서에 가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니까.”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불만 가득해지는 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서 한다던 결과가 이것이냐고 따지고 싶어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수가 없었다.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자식들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너는 거의 엄포를 놓듯이 말했다. 거기에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주일 가량 흘렀고 날씨는 좀더 무더워졌다. 계절은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고 도쿄에서 처음 맞는 여름은 거의 혹독하게 느껴졌다. 밤이면 그런대로 선선한 미야기와는 달리 도쿄의 열은 한밤에도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푹푹 찌는 열에 갇힌 도시에선 어딜 가든 더웠고, 나는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좀 더 너를 사랑했다. 나는 여전히 너와 보냈던 저녁에 대해서 잊지 못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하루에 너와 나 사이에 존재했던 경계가 허물어졌다. 맹세컨대 의도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너와 접점을 만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으니까. 순전히 내가 고집부렸기 때문에 너와는 대화다운 대화 몇 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린 부쩍 가까워졌다. 너는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자연히 늘었다. 어느덧 나는 너와 교정을 걷고 있었다. 온전히 내색할 순 없지만 너와의 시간을 좋아하고 너와의 대화를 좋아했다. 너와의 접촉을 꺼렸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너를 사랑하게 될까봐. 네게 점점 더 많은 여지를 내어주는 일이 무서웠고, 나는 너에 관해서는 그렇게 철저하지가 못했다. 그럴수록 괴로움도 같이 몸집을 불렸다. 결국 자승자박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평온함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최초부터 고통스러웠던 짝사랑이었으므로 최후도 그런 식으로 끝장나리라고 예견하지 않았나. 난 고통스런 짝사랑의 방식밖엔 알지 못했다. 나는 고통과 사랑이 스펙트럼처럼 이어져있음을 배웠고 그 고통은 관성이 되었다.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영원히 불타는 여름은 없다는 생각이 얼마간 내 숨통을 틔웠으나 아직은 여름의 한가운데였다. 뜨거운 듯 서늘한 듯한 초여름을 막 지났을 뿐인.
너와 내가 친해진 일에 대해 주위에서 자주 물어왔다. 데면데면했던 녀석들이 붙어다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충분히 궁금해 할 만했다. 늘 나는 너를 무시하고 횅하니 가버리기 바빴으니까. 그러면 우린 사실대로 곧이 말해주었다. 사실 우린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미야기에서 지겹도록 마주쳤고 경기도 많이 치렀다고. 그간은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서먹했던 것뿐이라고. 웬만한 의문은 그 말로 해명되곤 했다. 같은 미야기 출신이라는 사실로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다.
코트 위의 내 여름은 치열하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코트에서 점프하는 순간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아서, 코트 위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저학년 팀에서 세터로 활약했고 다음 추계리그에서는 최소한 핀치서버 자리를 확보했다. 추계리그 주전 선발은 여름방학 직후였다. 중요한 기회를 앞두고 있었기에 우리는 방학 내내 체육관에서 살아야 했다. 대학생활은 어느정도 일정한 궤도를 타고 굴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나를 구타했던 놈들에게 공을 올려주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개중에 가장 노골적이었던 노란머리, 타케우치는 여전히 주동하여 나를 괴롭혔다. 실수라도 하면 잡아먹을 듯이 몰아세우는 것이다. 하필 그 사람 포지션은 스파이커여서, 아무리 싫어도 공을 올려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나는 내 페이스를 잃지 않고 배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를 잃은 건 오히려 그 사람 쪽이었다. 아무리 내가 잘 맞춰주는 세터라도 마구잡이로 점프하는 사람에겐 일일이 맞춰줄 재간이 없었다. 제멋대로 날뛰는데 오히려 전부 맞춰준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미 그 사람에겐 득점할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화풀이를 하는 거겠지. 내가 신경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후배인 내가 참는 것일 뿐. 아무리 참는대도 결국 스파크는 한 번씩 튀게 마련이었다.
“너 공 똑바로 못 올리냐?”
“죄송,”
“선배가 못 맞춘 겁니다.”
대강 사과하고 넘기려는데 네가 불쑥 끼어들었다. 선배는 자존심이 흔들렸다는 것이 여실한 낯이었다.
“친구라고 감싸는 거냐? 이 새끼도 공사 구분 못 하네?”
“선배야말로-”
“어이 우시지마, 타케우치.”
주장이 타이밍 좋게 말허리를 잘랐다. 잠시간의 대치는 그러나 코트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히기에 충분했다. 나와 타케우치 선배 사이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는 건 팀에서 공공연해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 제삼자였던 우시지마가 개입되었다. 물론 일방적인 피해자는 나였지만 팀 분위기가 점차로 험해지고 있었다. 주장은 박수를 치고 격려하며 다시 연습을 재개했지만, 나는 주장에겐 사실대로 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대로 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퍽, 하고 배구공이 등을 때렸다. 연습이 끝나고 비품실을 정리하던 차였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내가 한 생각은 빠져나갈 문이 있는가 하는 거였다. 하지만 재수없게도 난 체육관의 비품실 안쪽이었고, 비품실 문간은 선배들이 막고 서 있었다. 체육관엔 여기있는 사람 말고 아무도 없으리라.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혼자 있는 틈을 타서 찾아온 것이다. 내 등에 튕겨 저편으로 굴러간 공을 바라보며 짜증이 솟는 걸 느꼈다. 핸드폰은 내 수중에 없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주장이 너를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나는 그들과 똑바로 마주섰다. 이제부터 겪을 일은 배구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일 테다.
“뭔데요, 또.”
“보자보자 하니까 또 기어올라서 말야.”
두 번째 배구공이 날아왔고 나는 손바닥으로 쳐냈다. 공은 선반에 부딪치며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쭈, 반항하는 것 봐.”
역시 이번 주동자도 타케우치였다. 그 패거리가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려고 했는데, 아마도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일 년을 더 버틸 자신이 없다.
“난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더라. 실실 웃고 다니면서 온갖 여우짓은 다 하거든.”
이번엔 웃기지도 않은 얼차려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이었다. 나는 그 선배의 얼굴과 뒤에 서 있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선배도 웃고 다니시든가요.”
함부로 말이 나간 건 내 나름의 오기였을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기도 했고 이미 관성처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것에 압도되어 죽더라도 이해할 마음이 있었다. 그 고통은 너를 사랑하며 대가처럼 감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고통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얻어지지도 않는 고통은 그저 나를 힘들게만 했고,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내 행실이 어떻건 내 맷집이 어떻건 그들로 인해 고통받을 이유는 아무것도. 그러나 당장에 눈앞이 흐렸다. 이전에 맞았던 곳을 재차 맞았기 때문에 연신 토기가 일었다. 위를 차일 때에는 정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미 한두 차례 피를 토한 것 같기도 했다. 몇 번인가 주먹이 나갔던 것 같지만 남자 셋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맷집 한 번 끝내주네. 마음에 들어.”
바닥에 쓰러진 내 머리채를 붙잡고 타케우치가 말한다.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들고 그 눈을 응시한다. 이 두 눈에 똑똑히 새겨두어야 했다. 이쯤 되면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말이다. 그때 뒤에서 선배 하나가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내 핸드폰이었고, 액정엔 너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네가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걸 확인한 타케우치는 씩 웃었다.
“내가 말했지. 이 새끼들 수상하다고.”
“아, 징그럽게.”
그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어이없게도 모든 걸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너와 내가 가까워진 일에 대해 의뭉스레 보는 이들 중엔 정확하고 예리한 촉을 가진 이들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 이 사람이었고. 그가 왜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지,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나 하는 의심이 이제야 들었다. 기침을 뱉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수상하다는 게 그런 의미였어요?”
“맞혔지?”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해요?”
들켰다는 무서운 감정을 앞질러 분노가 먼저 튀어나갔다. 입가를 쓱 문지르니 피가 묻어나왔다. 이번에는 골라가며 때릴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다. 입안에 고인 끈적한 타액을 뱉으니 핏빛이 섞여 나왔다.
“아, 혹시 선배가 그 쪽이라서?”
“뭐 새끼야?”
“맞구나.”
그 자식이 했던 것처럼 씩 웃어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한 가지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화가 나면 길길이 날뛰기보다 오히려 조용해지는 타입인 것이다. 아무려나, 그건 내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었다.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길이 돌연 내 뺨을 쓰다듬는다.
“와카토시가 잘 빨아주든?”
“그냥 때리지 그래요.”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우리 토오루.”
손바닥이 얼굴을 철썩 쳤다. 키들거리는 웃음 속에 손가락 관절이 우둑거리는 소리가 선연했다.
체육관 바깥으로 나오자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 핸드폰을 켜자 너의 메시지들이 쏟아졌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비품실에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짧고 굵었다는 생각이 들어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때마침 너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응. 시내 나오느라고 못 받았어. 체육관? 아까 너 나가고 바로 나왔지. 세이죠 친구가 근처에 오기로 했거든. 응, 걱정 좀 하지 마.”
덤덤한 목소리를 꽤 잘 쥐어짜낸 것 같다. 빈 교정을 걸어나오며 나는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건 어떤 벌도 대가도 될 수 없었다. 내 배구는 이런 일에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도저히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아서 근처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음료 한 잔 시켜놓고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일어서기 전, 주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 달라고. 그런 후에야 가게를 나와 자취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배구공 하나 쫓아서 십 대를 보내고 체대까지 들어왔다. 이제야 마음껏 배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지메를 당한다니.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나의 감정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목과 발목, 무릎은 그나마 멀쩡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도쿄의 첫 번째 여름은 몹시도 혹독했다. 이러다간 결국에는 배구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거였다. 견딜 수 없을까봐. 중요한 걸 타협하고, 결국에는 내가 내 감정에 잡아먹힐까봐.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최소한 끝이라도 정해져있다면 좋을 텐데.
“오이카와.”
맨션 앞 골목에 들어섰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맨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네 모습에 덜컥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경악스런 얼굴로 너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 와 있어?”
“.........”
너는 그러나 말없이 나를 응시한다.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에 나는 내 입술이 터져있다는 걸 깨닫는다. 손등으로 문지르니 입가에 피가 엉겨붙어 딱딱해져 있었다. 다시 화가 났다. 결국 너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생긴 마당에 너는 나를 못 믿어서 여기까지 와 있다는 사실에. 오늘 너를 방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독하게 마음먹은 다음이었다. 나는 모질게 말하며 네 곁을 지나간다.
“그만 좀 쫓아다녀. 그러니까 괜한 오해나 사는 거 아냐.”
“오이카와, 생각해봤는데.”
그러나 낮고 떨림 하나 없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고.
“네 말의 대부분은 진심이 아닌 것 같다.”
그 말에는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를 돌아본다.
“네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너는 한 꺼풀만 벗겨보면,”
“착각하지 마.”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은 벌컥 화를 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성큼성큼 맨션 계단을 올랐다. 굴하지 않고 네가 따라왔다. 심장이 떨렸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삼층 맨션까지 단숨에 올라가 번호키를 누르는데 손가락이 마구 떨렸다. 숨을 토해내며 네가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몸을 밀어넣었고, 네 손은 놓치지 않고 문을 콱 붙잡았다. 그만 가라고 소리칠 새도 없이 너는 집안에 들어왔다. 나보다도 더 빠른 동작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왜 너는 나에게 화낼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한 번쯤은 내 뜻대로 해주어도 되지 않는가. 왜 내가 너와 좁은 현관에서 씩씩거리고 있어야 하나. 너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마치 자기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듯 하는 완고함에는 칼이 들어갈 여지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네가 구해줄 대상도, 보호해줄 대상도 아니야.”
“그 자식들,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꼴이 이게 뭐냐.”
“그러니까 왜 네가 이렇게까지 화내는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만 좀 간섭하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 친한 척 하지 말란 말이야!”
이제는 너에게 감정을 숨길 마음이 없었다. 비품실에서보다도 더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목소리가 커졌고 감정을 왈칵 쏟아내자 숨이 더욱 가빠졌다. 어깨까지 떨리는 분노를 나는 어찌하지 못했다.
“너는 대체 언제쯤이면 내 말을 들어줄 작정이야? 그만 좀 꺼지라는데, 제발 꺼져달라는데 왜 가만 놔두지를 못하냐고! 왜 항상 내 앞을 가로막는데? 미야기에서도 모자라서 대학까지 와서 이래야겠냔 말이야! 아직도 직성이 안 풀려? 날 밟아죽여야만 그만둘 거야?"
“오이카와 난,”
“오늘 그 새끼들이 그러더라, 너랑 내가 수상하대.”
임계점. 나는 그만 눈을 감는다. 마구잡이로 호흡을 내쉬고 들이쉬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눈을 뜨니 네 커다란 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내 십 대의 끝자락을 우울로 물들였던, 그림자 속에 감춰두고 아무에게도 비치지 않았던 언어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계를 초월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사랑해.”
단 한 문장, 두 사람의 언어와 관계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그 한 문장을 발음한다.
“너를 사랑해. 네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너를 욕망해. 그러니까 제발 내게서 떨어져. 그러면 지금까지처럼 죽은 듯이 지내줄 테니까. 너의 인생에 손가락 하나 얹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우시지마.”
이제 나는 나가달라는 뜻으로 몸을 틀어 현관문을 가리킨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네 얼굴이 볼만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사수하려던 것을 스스로 훼손했다. 우리의 최종장은 내 입술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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