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U M M E R T I M E S A D N E S S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내게서 떨어져.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두 문장 사이의 간극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하고싶어 죽을 것 같았던 말과 절대로 하고싶지 않았던 말을 연달아 말했다. 내 입술에서 비롯된 말들이 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처박은 꼴이었다. 눈앞이 깜깜했고 이제는 정말로 죽고싶은 마음뿐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커다란 손이 얼굴을 쥐었다. 단단히 힘이 들어가있는 것에, 어쩌면 그 손이 나를 때리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네 눈은 화가 난 듯 날카로워져 있었다. 눈을 감아야 할까. 쏟아질 경멸을 감당할 준비까진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오해야 하는 거겠지. 최종장은 내가 펼쳤으므로. 마침내 때가 온 것뿐이다. 다음 순간 닿아온 것은 그러나 네 입술이었다. 놀라서 커다랗게 눈을 뜨니 흐린 초점으로 네 얼굴이 보였다. 아주 가까이로 네가 다가와있는 것이다. 좁은 현관에서 벽으로 밀쳐지는 건 순식간이었고, 네 팔과 벽 사이에 몸이 가둬지자 싫어도 깊이 맞물려야 했다. 부딪힌 입술의 감각에 적응하기도 전에 급히 밀고 들어오는 혀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안을 가득 메우는 양감과 그 열기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이만한 온도가 어디에 숨겨져 있었을까. 너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입안에 섬뜩한 쇠맛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입가에 뭉친 피딱지가 벌어진 듯했다. 피가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아무런 맛이 느껴질 수가 없는, 이제는 피맛이 나는 입술을 네가 갈급히 빨아들였다. 그 열기에 머리끝까지 절여질 것만 같아 빈 벽을 더듬었으나, 허사였다. 지탱할 데가 없었다. 나는 벼랑에서 밀쳐지기 직전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날 혼곤하게 했던 건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너와 혀를 얽고 있었다.
마구 몰아치던 뜨겁고 축축한 혀와 입술의 감각이 돌연 멈추었다.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반 뼘 남짓한 공간을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이만큼 좁은 거리에선 도저히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갈랐고 너의 시선은 내 눈동자에서 미끄러져 입술에 걸렸다. 네 입술은 내가 묻힌 피로 불긋하게 물들어있었고 나는 단지 그걸 핥고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너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키기가 무섭게 다시 네가 덮쳐왔다. 엉망으로 터진 입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비리고 야릇한, 적나라한 살덩이를. 두 팔을 네 목에 둘러 끌어안았다. 가슴이 닿았고 다리가 섞였다. 이렇게 하고 싶던 것을 너는 모르지. 아랫입술이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주자 네가 좀더 깊은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제대로 숨 쉬지 못하긴 우리 둘다 마찬가지였지만, 누구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밀쳐지지 않기 위해 네게 애걸하듯 매달려야 했다. 어느새 나는 너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제발 나를 놓지 말아달라고. 네가 나를 밀치면 난 벼랑아래로 떨어져죽을 것이니 이렇게 매달리도록 허락해달라고. 잠시만, 이 순간에는 그냥 이렇게. 그래 이건 갈애였다. 너를 욕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 네게 안겨 끓는 몸을 맞대고 네 혀가 내 입안을 헤집어주길 바랐다. 네가 입안의 축축한 벽을 문지를 때마다 못견디게 두려웠다. 피의 맛이 더는 느껴지지 않고 제대로 호흡하지 못해 아찔해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얽은 혀와 팔다리를 풀어냈다. 다리가 휘청하고 부박한 호흡이 마구잡이로 터져나왔다. 혼곤해진 눈으로 너를 바라본다. 너를 향한 열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죽기 직전의 짐승이 발악하듯이 그렇게 너를 도발했다. 그리하여 네가 내 적나라한 욕망을 낱낱이 목도하고 경멸하길 바랐다. 그때에는 오롯이 고통에 잠식될 수 있겠지. 늘 생각했던 우리의 마지막 장면이었고, 그림은 완성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엎질러진 물을 난 주워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늘이 드리운 네 눈은 여느 때보다도 검게 보였다. 이제 나는 네 뜨거운 입술에서 흘러나올 최후의 말을 기다렸다.
“토오루.”
나직한 절망의 목소리. 오싹함이 등허리를 내달렸다. 네 입술이 나를 꾹 누르는 바람에 대꾸할 수가 없다. 다시금 입과 혀가 얽혀들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네 멱살을 쥐고 뒤로 밀었다. 너는 현관 문턱에 걸려 뒤로 휘청하더니 그대로 넘어지고 만다. 윽 하는 외마디 신음이 터져나온다. 그래도 나는 네 허리 위에 올라타 앉는다.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단단한 것이 무언지 모를 수가 없을 만큼 몸을 붙인다. 나의 탐욕이 어느 정도인지 기어코 확인해야겠다면 오롯하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이제는 네 앞에서 벌거벗을 수도 있었다. 필사적으로 감추려했던 것을 이제는 숨길 필요 없는 것이다. 좀 당황한 것 같은 네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야릇한 경멸감이 스스로에게로 쏟아졌다.
“오이카와.”
“왜, 장난이 심하다고? 난 진심으로 꼴리는데.”
그리고 함부로 손을 움직여 네 바지 앞섶을 더듬는다. 옷을 벗기기 위해서. 제멋대로 더듬던 손목을 네가 억세게 붙잡았다. 아팠다. 드디어 네가 정신을 차린 줄로만 알았다. 너는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야말로 나는 무슨 대가든 치를 각오를 했다. 네가 한 일은 그러나 내 신발을 벗기는 것이었다. 발을 모아 자신의 신발도 벗은 후에야 너는 나를 집 안쪽으로 끌었다. 침대로 밀쳐진 나는 이제 긴장하여 너를 바라본다. 네가 무릎 앞까지 다가왔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네 얼굴을 음울하게 비추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허리 양옆으로 무릎을 대는 것에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고, 너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하여 나는 네 팔다리 사이에 갇혀 꼼짝없이 너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달아오른 호흡이 내게로 쏟아졌다. 너의 것이었다.
“왜 나는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하지?”
화가 나 있다. 나는 숨만 헐떡일 뿐이다. 도무지 대꾸할 말이 없어서.
“말했지, 오이카와. 네 말의 대부분은 진심이 아닌 것 같다고. 그걸 깨닫기까지가 너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젠 알았고. 더는 못 속인다.”
이제 너는 거의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두운 허공에서 너와 나의 시선이 대치했다. 손목은커녕 팔다리도 속박되어있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네 밑에서 몸을 빼낼 수 있을 텐데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서로를 마냥 노려보는 시선은 호흡을 죽이기에 이르렀고, 내가 반항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너는 내 셔츠에 손을 넣었다. 셔츠가 위로 들리고 벌거벗은 가슴과 배가 드러났다. 하나둘 새겨진 멍자국들이 몸에 노랗고 푸르게 흔적을 남겨놓고 있었다. 나는 내 적나라한 몸을 따라 시선을 미끄러뜨렸다가 다시 네게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왜,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느냔 말이야.”
무엇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처음 네가 내 몸을 보았을 때보다도 경악스런 표정이었다. 너는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쓸었고, 나는 고개를 피하며 티셔츠를 도로 내렸다. 그리고 네 아래에서 몸을 빼내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보여주고 싶던 것은 적나라하게 엎질러진 물이었지 상처가 아니었다. 불을 켜자 아늑한 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너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동정하는 거라면 필요없어. 이럴까봐 끌어들이기 싫다는 거였는데...”
“......”
“이젠 어쩔 건데. 봐서 어쩔 작정이었는데.”
“......”
“봐, 할 말 없지. 네가 해결해줄 일이 아니야. 이제 너랑은 일없으니까, 제발 가.”
“오이카와.”
“그간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오늘은 너한테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어. 그냥 가 줘, 진심이야. 너에게 사랑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을 거야. 바라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네 눈엔 뭐가 씌어있는지 모르겠다. 뭐가 씌어있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지... 오이카와.”
“그러니까 네가 왜,”
왜 네가 나에게 애걸하는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이다. 갈애하는 사람은 나인데 왜 네가. 조금 전까지도 분노했던 너는 이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네 감정이 이토록 고저를 오가며 요동치는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일 테다. 적어도 우리 관계에서는. 상대가 나인 한은. 네 눈썹이 일그러졌다. 천천히 네 입술이 벌어졌다.
“아직도 내가 안 보이나? 오이카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너의 감정은 뭐라고 하는지.
연민.
하늘이 울었다. 먼 상공에서 천둥이 우릉거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큰 비가 쏟아지려는 징조인 것이다. 그날 오후 몰아치는 일들로 이미 몸은 녹초였다. 너를 사랑한다고 기어이 고백했고, 너와 키스했다. 나는 욕정의 증거를 보이려 했으나 네가 본 것은 폭력의 증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곧 네가 다가왔다.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을 붙들고 네가 쏟아부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부유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머리가 어질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혼돈에 잠겨있는 동안 너는 내 앞에 마주앉아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 꾸밈없이 올곧은 시선에 나는 죽을 것 같은 기분을 얼마나 느껴왔던가. 너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건 미워하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내리쬐는 한여름의 해처럼. 해는 자신의 열기가 사람을 어느 지경으로 말려죽일 수 있는지 개의치 않는 법이다. 너는 너의 순수한 열이 나를 어느 지경으로 괴롭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순수한 고통을 절절히 맛본 여름이었다. 너를 사랑하기 시작한 무렵도 여름이었다. 여름은 매년 되풀이되었고 나는 늘 고통스러웠다. 너를 만난 이래 나는 한시도 행복하지 않았다. 왜 내 사랑은 이토록 고통스러워야 하나. 내게는 끔찍하게 중요한 순수와 불순의 분별이 왜 너를 막지 못하는가. 최초도 최후도 고통스러우리라 여겼던 것은 나의 만용이었고, 어쩌면 이 고통에 끝이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두려움이 머리를 짓눌렀다. 네가 나를 연민한다.
“오이카와.”
네가 부른다. 네가 조금 더 가까이 맞붙었고 정강이에 네 다리가 닿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손길이 팔뚝을 쓰다듬었고,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서 너는 속삭였다.
“나를 미워할 필요는 없잖아.”
소나기가 쏟아졌다.
저녁 내내 꿉꿉하게 뭉쳐있던 공기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폭우였다.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며 낙하했다. 흠뻑 비를 맞은 듯 체온이 내려가는 걸 느꼈다. 울음이 내려간 목이 아팠다. 숯을 삼킨 것도 아닌데. 마땅한 대가를 치른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너는 내게 키스했고.
“다시 말해줘.”
나직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거센 빗발 사이로도 네 목소리는 정확하게 꽂혀든다. 너는 내 뺨을 문지르며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 다시 한 번만.”
“.........”
“진심이라고 했잖아.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할 생각은 마라.”
“다시 말한다고 뭐가 달라져?”
“......알겠다, 그럼 이 말은 들어줘.”
짧은 순간이었지만 네가 다시 입 맞출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열띤 시선이 내 입가에 머물러있었고, 몸을 쓰다듬는 손이 부드러웠으므로. 너는 그러나 내 몸을 떠안고 팔로 단단히 둘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 마라.”
“.........”
“그렇게 상처 하나 안 받는 것처럼.”
“.........”
네게도 나는 어디 죽여보라고 발악하는 짐승처럼 보였나 보았다. 네 눈에 나는 그렇게 비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진심을 간과하고 있었다. 발악하는 짐승의 심정이란 기실 죽고싶지 않다고 외치는 것과도 같다는 것. 죽여보라는 말은 죽이지 말란 말과 같았다. 너를 미워한다는 말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과 통하듯이. 너의 포옹을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었다. 네게서 원했던 것은 경멸이 아니라 이런 것이었다면.
그러므로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네 팔에 안겨 네 어깨에 턱을 괴고 비 쏟아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구도 아닌 너에게 안겨서 말이다. 귀를 씻는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도록 생각했다. 왜 이토록 괴로워야 할까. 꼭 괴로워야만 했을까. 진실로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 아닐까. 너를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내 마음은 모순투성이라 생각했다. 너는 내게 넘어서야 하는 벽이었고 부술 수 없는 벽이었다. 그걸 사랑하는 일만큼 역설적인 건 없다고 생각했다. 너로 인해 괴로움을 학습했다. 고통스레 시작한 짝사랑이었으므로 난 고통스런 사랑의 방식밖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사랑을 미움으로 덧칠해야만 했다. 너를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마음이 엉망으로 꼬여 나를 질식시키기에 이르렀다. 최종장의 다음 페이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모순의 끝은 파멸이리라 생각했다. 그 외에 뭐가 있을 수 있나.
하지만 모순이 아니었다면. 최초부터 양립가능한 무엇이었다면.
길어야 하룻밤 바짝 내리고 말 비라고 생각했다. 소나기인줄 알았던 비는 그러나 그칠 기미가 없었다. 너를 돌려보낸 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 숨도 잠들 수 없는 밤이었고, 불면은 내 오랜 친우였으므로 나는 기껍게 여겼다. 너에 관한 생각으로 잠을 설치거나 꼬박 밤을 새우는 것은 습관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내가 간밤에 할 것이라곤 그침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는 일밖에 없었다. 부정한 것들을 모두 씻어줄 것처럼 빗줄기가 죽죽 퍼부었다. 장대비는 그러나 더운 공기까지 해소하지는 못했다. 하룻밤이 지난 후에도 질기고 무더운 공기는 여전했고, 그 안에 난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하늘엔 회색 구름이 그득했고, 해가 그 뒤로 숨었다.
주장과의 약속이 있었으므로 오전부터 학교로 향했다. 교문에선 네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불쌍하게 여기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도 주장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러니까 같이 가.”
“.........”
그러니까 그 할 말이라는 건 너 좋을 대로 하면 될 텐데. 간밤에 한 숨도 자지 못했던 나는 너와 실랑이할 여력이 없었다. 네게 인사도 대답도 건네지 못한 채 무심히 교문을 지났다. 어찌되든 좋았다. 지난밤 나는 너에게 밑바닥까지 보였고, 더는 숨길 것도 에둘러갈 것도 없었다. 잠시 뒷모습을 응시하는 것 같던 너는 곧 보폭을 넓게 해 나에게 맞추었다.
“밤에 잠은 좀...”
너는 묻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너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자신을 책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네가 내 얼굴에서 피로와 고통을 읽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답이 필요없는 질문이었다. 확실히 나는 네가 흘끗 보는 것으로도 상태를 알 수 있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네가 낱낱이 확인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확인시켜줄 일에 속했다.
“.........미안한데, 추계리그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추계리그까지만 어떻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난 후 주장의 결론은 그랬다. 주장이라고 해봐야 처지가 크게 다를바 없는 학부생이고, 주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건 아니었다. 주장이 무언가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건을 공유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주장이지 않은가.
“타케우치는 우리 팀 레귤러 스파이커고, 스카우터가 봐둔 애들도 많아서... 그 자식이 경기에서 빠지면 여러 사람 곤란해지거든.”
“.........”
말하는 내내 주장은 민망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해서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고 궁색한 변명을 이어갔다. 기실 주장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건 내가 양해할 사정이 아니란 걸. 그런 주장 앞에서 나는 바닥으로 까라지는 기분을 느꼈고.
“...그러면 전 레귤러에서 빠지겠습니다.”
거의 입도 안 열고 듣고만 있던 네가 말을 얹었다. 주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를 보았다.
“우시지마, 뭐라고?”
“선발에서 빠지겠다고요. 타케우치와 같이 못 뜁니다.”
너는 단호했다. 무던하되 흔들림없는 어조는 네 대단한 고집을 말해주었다. 이미 굳어져서 주장이나 심지어는 나조차도 흔들 수 없는 결정. 네 선언이 얼마나 폭탄같은지 너는 하등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야. 그렇다고 네가 빠지면.”
“.........”
“아니, 1학년을 선발에 넣어주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럼 오이카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 추계리그가 끝나면 다시 논의하자고-”
“저흰 한 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이카와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험악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너의 분노와 경멸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나로 기인한 것이다. 나는 네 시선을 외면하고 맞은편의 주장만 응시했다.
“저도 더는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말씀드린 거예요. 입학했을 때부터 계속된 거니까.”
내가 입을 여니 커다래진 눈 두 쌍이 이쪽으로 향한다. 이것까지는 몰랐다는 뜻인 듯하다. 주장은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딱 멈추었다.
주장 말로는 작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작년에도 타케우치의 타깃은 있었고,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그는 3개월 출장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작년의 타깃은 배구를 관뒀다고 했다. 그 결정은 기실 전적으로 타케우치 때문은 아니었다. 관두려는 고민을 줄곧 해 왔던 차에 타케우치가 결정타를 날린 것이라고. 그는 개인이 배구를 포기하도록 일조했던 전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올해의 타깃은 나였다. 괴롭힘은 끝을 봐야만 끝날 것이다. 끝장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끝장이 나기 전까지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그럴 이유가 없으므로. 지긋지긋하게 마찰했기 때문에 나는 타케우치를 알았다.
“추계리그가 끝나면 더 심해질 걸요. 주장도 아시잖아요. 주장이니까 저도 믿고 말씀드리는 거고.”
내가 말했다. 주장은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알겠어. 쉬어. 치료할 거 있으면 하고. 어쨌든 네 잘못 없는 거 아니까... 감독님한텐 내가 보고할게.”
“......감사합니다.”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침묵이 감도는 어색한 공기로 돌아왔고 주장도 그걸 느꼈던지 요란하게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주장은 “그럼.” 하고 인사한 뒤 부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참담해진 공기를 수습할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진심이었어? 선발에서 빠지겠다는 거.”
“......”
여전히 바깥은 비였다. 빗속에서 네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 단단한 얼굴 속에서 나는 거짓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진심이었냐는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는 네 행동이 얼마나 겁없는 것이었는지 알까. 주장을 협박하는 1학년은 아마도 네가 처음일 것이다.
“네가 주장이었으면 이런 식으론 대응하지 않았을 거다.”
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너라도 그랬겠지.”
내가 대답한다. 너는 시라토리자와의 주장이었고 나는 아오바죠사이의 주장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주장을 해본 경험이 있으므로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우리라면 미온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니까. 작년까지는 주장이었다 해도 지금은 대학 신입생 신분이다. 그렇기때문에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폭력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배구만 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걸음을 멈추고 우산을 젖힌다. 빗물이 쏟아지는 한여름의 하늘을 우두커니 올려다본다.
“연습 좀 하다 갈래?”
내가 제안했고, 너는 언뜻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부실에서 여벌의 연습복을 주워입었다. 배구화까지 갈아신고 체육관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고무 냄새가 끼쳤다. 배구코트 특유의 우레탄 냄새다. 체온과 땀냄새라고는 느껴지지가 않아서 정적이 거대하게 느껴진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서 우린 웜업부터 시작했다. 발목과 종아리를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문득 빤히 바라보는 네 시선이 느껴졌다.
“.........”
무릎 부근의 시퍼런 멍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너는 머뭇거렸다. 아마도 괜찮으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빤하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리라. 너는 시선을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내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네가 모르는 흔적들을 낱낱들이 찾아내겠다는 듯이.
코트에서는 공과 네트와 선수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코트를 벗어난 문제는 모두 자질구레해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몸의 고통도 얼마간 잊을 수 있다. 그렇게 배구에 몰입하는 것이 좋았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토스와 스파이크 연습을 했다. 네가 공을 토스하고, 내가 리시브하면 네가 스파이크를 꽂아넣는 식이었다. 공이 그리는 직선은 거의 황홀할 지경으로 깔끔했고, 탕탕 울리는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경쾌했다. 네가 올린 공을 내가 때려넣기도 했다. 너와 나의 타점을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선 절대적인 연습이 필요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네 스파이크가 천장 높이 튀어오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숨을 헐떡이며 코트에 대자로 뻗었다. 우린 지쳐서 뻗을 때까지 몸을 움직인 것이다. 몸은 지쳤지만 기분좋은 열감이 감돌았다. 체육관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고른다. 하얗게 쏟아지는 조명에 눈을 감는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너에게 말한다.
“여기 천장 말야, 센다이 체육관 천장이랑 비슷하지 않아?”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네가 돌아본다. 놀랍다는 얼굴을 보자 내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이 걸리는 게 느껴졌다. 눈부신 천장을 다시금 올려다본다. 정말로 이 체육관은 센다이 체육관과 구조가 비슷하다.
센다이 시 체육관.
아오바죠사이와 시라토리자와. 인터하이와 봄고. 미야기에서의 기억들이 산개한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는 데에는 노력도 필요없었다. 바로 직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던 곳. 우린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감독님은 시라토리자와 학원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잘 봐두라고 했다. 너도 곧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너와 지겹도록 부딪쳤다. 중고등학교 내내 너를 상대해야 했다. 번번이 네게 가로막혔다. 너에게 대처하는 방법들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너로 인한 감정에도. 전국대회에 실패한 이후로는 TV화면을 통해 너의 경기를 바라보았다. 너는 본선에서 승승장구했다. 시라토리자와의 순위가 최정상까지 올라가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그 순위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다시, 미야기 대표 결정전을 앞둔 어떤 날이었다. 키가 좀 자란 때였고 몹시 더울 때였으니 인터하이 예선전이었을 것이다. 센다이 체육관에서 우린 웜업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듣는 땀을 닦다가 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는 듯 너는 놀라지도 않았다. 시선을 피한 것은 나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익숙한 두근거림이 나를 괴롭혔고 나는 미움으로 그것을 덧칠했다. 결과는 패퇴였다. 경기가 끝난 후 나는 언제쯤이면 너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곤 숨막히는 여름의 공기 속에서 네 여름을 지켜봤다. 내가 놓친 것을 너는 향유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너는 몹시도 빛난다. 모순된 감정이 양립했다. 여름이 늘 숨막히게 느껴지는 건, 이 땅의 여름이 유독 습하고 무더워서가 아니라 네 탓도 섞이어있다. 여름의 열기가 너와 맞물려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 십 대의 끝자락은 너에 대한 감정과 배구 사이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여름은 매년 찾아왔다. 고통스런 여름은 단 한 차례도 치유되지 못했다. 오직 우승으로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줄만 알았다. 기억의 바다가 일렁인다. 그 위에 몸을 띄우고 나는 중얼거렸다.
“인터하이. 첫 번째 인터하이 무렵이었을 거야.”
너를 사랑하기 시작한 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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