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U M M E R T I M E S A D N E S S
모든 일엔 끝이 있어야 하고, 가는 길이 나 있어야 한다. 끝도 가는 법도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 길에서 정처없이 헤매는 기분을 한동안 느껴야 했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방황했다. 배구의 길은 그 끝도 불투명하거니와 걷는 법도 어려웠다. 무엇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었다. 내 유일한 장벽은 너인 줄만 알았다. 너에 대한 감정을 갈무리하기 전에 다른 장벽이 날 가로막았고,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정체중이다. 불면은 오랜 친우였고 통증이 자주 눈앞을 흐렸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배구를 흔들어선 안 되었다. 나의 배구는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바로잡아야 하는 것들이 산적해있다. 더듬거릴지언정 다시 길을 짚어가야 할 때였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생각하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이 한 번에 정리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배구연습을 했다. 그리고 내 곁에 네가 누워있었고.
“그때도 너는 말했지.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고.”
체육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한숨같은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등을 붙이고 있는 곳이 도쿄인지 미야기인지 모호해졌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옆에 누워 내 목소릴 듣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눈을 감으니 첫 번째 인터하이를 더욱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오렌지코트의 함성이 귓전을 울린다.
“나야말로 너한테 충고하고 싶었어. 진짜 길을 잘못 든 건 네가 아니냐고... 왜 자꾸 날 찾아와서 속을 뒤집어놓았던 거야.”
그때부터 내 고통이 시작된 줄은 까맣게 모르고서 말이다. 첫 번째 인터하이는 내게 패배의 통한뿐 아니라 너에 대한 갈망도 안겨준 계기였다. 너는 돌조차 던진 적 없는데 나에게 파문처럼 번지는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 감정을 받아들인 순간 나는 마음속 가장 깊고 어두운 자리에 묻어두고 영원히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것으로 믿었기에. 그러나 너와는 싫어도 마주쳐야 했다. 많아야 일년에 서너 번, 지역예선과 친선경기를 제외하면 만날 일이 없는데도 그 서너 번이 힘들었다. 경기가 끝나면 나는 네 눈을 곧장 응시하지 못했다는 걸 너는 알았을까. 그런 나를 붙잡고 너는 자주 말했다. 내가 너의 학교에 갔어야 했다고. 세터인 나를 원하는 것이다. 네가 무심한 걸 탓할 수도 그렇다고 내 마음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날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울었다. 슬픔에 하릴없이 덮쳐지면서도 언제쯤이면 너를 진정으로 미워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불면과 통증의 대가들은 그러나 마음을 식히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너와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나 역시 너와 함께 배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네가 시라토리자와 주장이 아니고 나도 아오바죠사이 주장이 아니게 되면 그때에는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었다. 어쩌면 나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건 것이었다. 내가 고통받아야 하는 이유가 너와 정반대 위치에서 만났기 때문이라면 같은 자리로 옮겨가면 되지 않겠는가. 너와 같은 대학에 진학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대학에선 매일 네 얼굴을 봤고 나는 넘치지 않게 너를 사랑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범람하지 않게 네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네가 내 속사정을 알아차렸을 때 어떤 얼굴을 할지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얼음을 끼얹었다. 때로는 숯이었다가 때로는 얼음이 되는 마음. 숯과 얼음을 오가는 동안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우리의 여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진심이야. 그러니 못 들은 걸로 하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그걸로 널 괴롭히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너는 네 갈 길을 가.”
그렇게 고백하는데 이상하게 힘이 들지 않았다.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생소한 감각에 눈을 뜬다. 다시금 눈에 빛이 쏟아져 눈가를 좀 찌푸려야 했다. 그러나 얼마간은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직감한 것이다. 어떤 끝에 직면했다는 것을. 고개를 조금 돌려보니 어느새 네가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러나 무연히 나를 응시했고,
“한 번쯤은 내게도 고백할 기회를 줘, 오이카와.”
그예 나는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손으로 바닥을 짚고서, 땀이 미처 식지 않은 네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우리가 강한 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돌려주는 대답은 그것이었다. 다시, 네 한결같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너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낯선 문장이 머릿속을 느리게 흘러갔다.
네가 내 몸을 끌어안았던 그날 촉발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 동정도 연민도 아닌,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것의 정체에 대하여. 그것은 다시금 우리 사이로 뛰어들어 파문을 일으켰다.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솟아오르는가 싶었던 문장들이 다시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네 입술에서 왜 그런 문장이 나왔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네게 대답하지 못했다.
연습이 비는 날이었다. 너와 내가 맹목적인 배구를 하는 동안 아무도 체육관을 찾지 않았다. 비온 후에 오히려 더욱 후텁지근해지는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 땀까지 흘렸으니 자연히 우리의 행보는 라커룸이었다. 벤치에 앉아 땀을 닦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네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두커니 너를 바라보았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딱딱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땀을 많이 흘렸다. 씻고 가.”
샤워실을 가리키며 너는 말한다. 너는 벌써 티셔츠를 벗은 참이었고 나는 그 손끝을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우시지마.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뭐가.”
“뭐가라니. 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냐고.”
“너도 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잖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도.”
“......”
“물었지, 오이카와. 왜 너는 진심이면서 나는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하냐고.”
네가 한 걸음 다가온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는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너와 대등하게 마주보고 선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더 증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보여줬던 것으로 부족했나? 부족할 리가 없었다. 아직도 내 머릿속을 정욕으로 꽉 채울 수 있을 만큼 너를 원하는데. 네 입술 언저리를 시선으로 더듬는다. 이런 순간에도 너에게 입맞추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때 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네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 발자국 더 너의 앞으로 다가간다. 네가 나에게 그늘을 드리울 만큼 아주 가까이. 올곧고 흔들림 하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직선으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숨이 얼굴을 간질인다. 한 손을 들어 너의 뺨을 문지른다. 동요하지 않을까. 흠칫하며 내 손을 쳐내지 않을까. 짧은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너는 가만히 얼굴을 내어준다. 해도 돼? 눈으로 물으며 너를 바라본다. 미동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턱을 조금 들어올린다. 너에게 입을 겹치고 지그시 누르고 있는다. 키스했다가 떨어질 때까지도 우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미세하게 변하는 무언가를 낱낱이 포착할 것처럼. 네 입이 벌어졌다.
“오이카와.”
“......우시지마.”
내가 대답했다.
덥고 습한 공기가 라커룸을 메웠다. 부실에 나 있는 창은 하나도 열려있지 않았고 우린 운동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미 체온이 올라 있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는 게 이유였을까. 잘 모르겠다. 어느새 우리는 끌어안고 혀를 얽고 있었고, 단전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에 비틀거렸다. 입안에서 너의 혀가 빠져나가자 눈이 뜨였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머리끝까지 성욕이 차올라 눈이 가물가물했다. 너도, 나도. 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건 열기 때문이다. 더워서 죽을 것 같은 기분. 그러나 뜨겁게 고인 호흡이 흩어질까 두려웠다. 참지 못하고 네 입술에 매달리니 네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왔다. 살덩이를 주무르는가 싶던 커다란 손이 대번에 바지를 내렸다. 그 다음은 터무니없이 쉬웠다. 뜨겁게 부풀어오른 아랫도리를 비비자 그 묵직한 양감만으로 정신이 혼곤해졌다. 우리는 금세 몸을 비비는 행위에 몰입했고, 우리는 우리가 뭘 하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급히 두리번거렸지만 라커룸에는 간이의자가 몇 있을 뿐 그마저도 칸칸이 나뉘어있어 몸을 눕힐 수가 없었다. 샤워실로 네 몸을 떠민다. 네가 내 팔뚝을 세게 붙잡았고 그 짧은 거리에 다리가 몇 번 꼬였다. 너밖에는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네가 가까운 샤워기의 물을 틀자 온수가 쏟아졌다. 습기가 샤워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벌거벗은 네 몸은 온통 뜨거웠다. 너는 양 팔 사이에 나를 가두고 다시 입을 맞춰왔고, 나는 네 등을 더듬었다. 미끈한 허리를 거꾸로 더듬어 올라가 네 목까지 닿는다. 이미 혀를 섞고 있었음에도, 힘주어 네 목을 당기자 네 몸이 딸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번뇌의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번뇌할 여지라곤 주지 않겠다는 듯 불꽃은 그렇게 활활 타올라 나를 잡아먹는다. 머릿속이 끓는다. 앞을 쥐고 흔들지 않아도 이미 너와 마찰하고 있었다. 삽입해서 위로 쳐올리는 것처럼 너는 허리를 움직였고, 나는 결국 신음을 터뜨렸다. 네 손에 모아진 성기를 위로 미끄러뜨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키스할 여유가 도무지 없어서 그만 네 어깨에 턱을 괸다. 네 목을 끌어안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쾌감에 덜덜 떨며 네 목에 입술을 문지른다. 허릿짓은 뚝뚝 끊기는 것처럼 유연하지가 못했다. 그만큼 너도 급하다는 뜻이겠지. 온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 없었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네가 손을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하얗게 터졌다. 네 목에 매달려 어깨에다 이마를 문지른다. 마구 뛰는 네 맥박이, 호흡이, 체온이 모두 선연했다. 땀이 흐른 피부의 냄새도 맛도 감촉도. 넘칠 것만 같은 심정을 느낀다. 네가 선단을 문지르자 결국 더는 참지 못했다. 네 억센 손바닥에 정액이 가득 퍼지는 게 느껴졌다. 눈조차 뜰 수 없는 쾌감이었다. 정액으로 끈적해진 손을 너는 더욱 세차게 흔들었다. 요란한 물줄기 소리로도 미끌거리는 소음이 귀에 박혔다. 귓가에는 네 가쁜 호흡이 쏟아졌다. 너를 끌어안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우시지마, 하고 네 이름을 중얼거렸다. 네가 나를 벽으로 다시 몰아붙였을 때, 복부에 액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사정한 것이다. 넘칠 듯 말 듯했던 표면이 한순간 왈칵 넘쳤다. 경주를 끝낸 듯 우린 두서없이 숨을 터뜨렸다. 정액으로 진득해진 손을 너는 몇 차례 더 흔들었다. 나자빠질 것처럼 무릎에 힘이 빠졌다. 얼굴을 들어 너를 보았다. 흥분이 일순 해소되었을 뿐 이 행위는 한 번으론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모두 다 알고서 시작한 일이다. 얼마간은 울고 싶은 심정을 느끼며 네 어깨에 머리를 대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죽을 것 같다고. 헐떡이는 목소리로 너는 대답했다. 나도 그렇다고.
우린 몇 차례 더 그 행위를 반복했다. 지칠 때까지 배구했던 것처럼, 지칠 때까지 벌거벗은 몸을 마찰했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서 기갈이 난 사람처럼 나는 네게 매달렸고 너는 나를 마구 안았다. 멍이 들어서 얼룩덜룩한 몸 곳곳에 입을 맞추고 온몸을 습기로 흠뻑 적셨다. 그 행위를 통해 확인한 건, 어쩌면 나와 대등할지 모르는 너의 성욕이었다. 말하자면 가능성이었다. 기실 너와 나의 감정의 결이 같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건 결코 기적적이거나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기다렸던 것처럼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괜찮을 것 같았으면 난 이토록 괴로울 필요가 없었다. 배구와 네가 양립할 수 있을까. 배구의 길에 갖가지 욕망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흠집 하나 없어야 할 우리의 배구가, 그러고도 무사할까. 불확실하고 불가해했다. 그래서 더욱 네게 매달렸던 것 같다. 휘청휘청하는 나를 네가 몇 번이나 다잡았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행위의 끝에 너는 중얼거렸다. 내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그러나 너에게서 흘러나왔다. 동요라곤 없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래서 듣는 사람까지 아무렇지 않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안에는 그러나 커다란 파문이 번졌다. 뱃속이 여전히 뜨거웠다.
“아직은.”
당부하듯 너는 재차 중얼거렸다. 그것도 모자라단 듯이 다시 한 번 더. 아직은.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내게 하는 말이라고 믿어도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득해진 정신으로 너를 바라봤다. 네 눈에는 뭐가 보이는 걸까.
여름의 열기를 늘 실감한다. 한여름을 지나고 있는 계절에도 때때로 새롭게 느끼곤 한다. 찌는 듯한 온도와 정체된 공기와 그 때문에 인적 하나 없는 거리를 바라볼 때면. 그리고 늘 나를 향하는 네 시선을 마주보노라면. 너는 내게 여름이었고 여름은 한결같이 잔혹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내리쬐는 열은 얼마나 순수한지, 그 순수함이 사람을 어느 지경으로 말려죽일 수 있는지 개의치 않는 법이다. 순수한 열이 누굴 고통의 시렁에 빠뜨리는지 알지 못한 채 마냥 열을 내리쬐는 것이다. 그런 여름을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여름을 핑계대며 슬픔에 잠식될 수 있었다. 내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전부 여름 때문인 것처럼, 미움의 이유를 전가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순수하지만 가혹한 열기가 비난받아 마땅해졌다. 전부 배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들을 더는 숯으로 칠해버릴 수 없었다. 정말로 배구를 위한다면.
“오이카와 나이스토스!”
기시감이 느껴진다. 우리의 합은 한층 정확하고 강하게 맞추어진 참이었다. 네가 때리는 공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코트에 꽂혔다. 부원들이 환호했다. 네가 손바닥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대학의 배구세계는 중고교 시절 부활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코트에는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이 달려있다. 주장 같은 경우는 이미 실업팀과 가계약이 되어있는 몸이고, 스카우터가 다른 부원을 물색하는 시기였다. 밥줄과 연줄이 경쟁하는 세계에서 일이 바른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고는 먹혀들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감독은 감독의 일을 하고, 주장은 주장의 일을 한다. 최소한의 자리만 차지한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나도, 너도 열외는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랑 같은 학교 출신이랬나?”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요. 미야기에서 자주 경기했습니다.”
너와 나의 연계공격에 선배들이 반색을 했다. 그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며칠 만에 공격이 훨씬 예리해졌다는 것이다. 그 며칠간 너와 배구만 했던 것은 사실이다. 며칠 만에 대단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지만, 나는 너의 타점을 좀 더 편하게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 자식들 이상하게 친해졌다니까요.”
그리고 빈틈을 놓치지 않고 찌르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타케우치는 절반은 농담인 척 의도적으로 실실 웃었고, 다른 부원들이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그들은 이 말에 숨겨진 가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장난인 양 웃는 낯으로 대꾸해주었다.
“6년이나 치고받았는데 안 친한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뭐래? 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시지마 쳐다도 안 보더니.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선배, 언제부터 그렇게 저한테 관심 있으셨어요?”
“보면 알지. 니네 진짜 기분나쁘-”
“야.”
그때 주장이 사이를 저지했다. 타케우치는 휘어진 눈매로 주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주장의 뜻을 알았다는 듯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농담 아닌 농담이 흐지부지되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다시 말을 붙여왔다.
“뭐 착각하나 본데, 나는 너한텐 관심없거든.”
“나도 선배 생각같은 거 관심없는데요.”
“근데 너 쓰러뜨리는 건 꽤 재미있고.”
“......제가 왜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요?”
더는 웃는 낯으로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싱글거리던 타케우치의 얼굴 역시 제 기분대로 딱딱해졌다.
“진단서며 증인이며 지금 저한테 들린 증거가 몇 개인데, 이 다음에 제가 뭘 할 것 같아요?”
“너 배구하기 싫은가 보다?”
“그거랑 배구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요.”
“무서울 거 없다 이거네.”
“왜 무서운지도 모르겠고.”
노골적으로 증오한다는 표정이 돌아왔다. 증오의 원인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꾸밈없이 솔직한 표정을 보자 오히려 내 속은 시원해졌다. 난 무섭지도 않고 겁낼 것도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너도 배구 계속하고 싶으면 이제 좀 닥치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타케우치의 온도가 내려가는 게 우스웠다. 녀석은 자신이 개에게 단단히 공포를 가르쳤다고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그 개가 언젠가 다리를 물어뜯을 것이라곤 상상 못한 것이다. 물론 조금 놀랐다고 해서 금세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개인적으로 싸워야 할 것이고, 내 자리를 내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모두 각오한 참이었다. 내 배구는 몇 번 발길질당했다 해서 무너지지 않았다.
다시 이 주일 가량 흘렀다. 여기서 더 더워질 수 있을까 싶었던 날씨는 그러나 더욱 무더워졌다. 최고기온이 매일 갱신되었고 사람들이 태양 아래선 맥을 못 추렸다. 그 사이 추계리그 선발전을 치렀다. 이변은 없었다. 나는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매 경기 출전하는 레귤러는 아니지만, 내가 핀치서버이자 세터역할을 온전히 해내는 선수라는 점이 고려된 결과였다. 그에 따라 3, 4학년과 다름없는 훈련 스케줄을 소화했다. 팀의 주전세터는 너의 타점을 맞추는 데 애먹었다. 세터는 그렇게 잔소리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너와 연습할 때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대신해서 투입된 나는 너에게 완벽하게 맞춰주었다. 감독님은 새로운 콤비의 등장에 기뻐했다. 앓느라 허해졌던 몸에 기력을 보충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어쩌면 나는 트레이닝보다도 먹는 일에 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궤도를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 모든 과정들에 네가 있었다. 네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기는 여전했다. 여름날의 무더운 공기처럼 아직 교착상태인 것이다.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나는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너도 다시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우린 공공연하게 알고있는 사실을 접어두고 일상을 살아갔다. 훈련이 끝나고 귀가할 때면 너는 굳이 길을 에둘러 우리 집을 거쳤다. 네가 내 벌거벗은 몸을 확인하고, 거기에 입맞추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나는 너에게 키스했다. 네가 나에게 키스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곤 말없이 헤어졌다. 그 모든 행위들은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우리만의 방편이었다. 감정의 변화도 외부의 사건도 한꺼번에 겪느라 혹독하게 앓았던 여름이었다.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던 여름은 그러나 아직 한창이었다.
“인터하이 관람권을 구했다. 내일 2시 경기야.”
네가 불쑥 티켓을 내밀었다. 내 대답이 뭐라고 나올지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 기가 찼다. 대꾸없이 티켓을 쳐다만 보고 있으니 그때서야 네가 덧붙였다.
“보면 재미있을 거다.”
이유치고는 그다지 납득되지 않았다. 인터하이 경기야 매년 열리고, 내가 출전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현장에 갈 필요까지 있을까. 경기가 보고 싶으면 TV중계로 봐도 좋을 텐데. 회의적인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터하이와 너와 고통을 연관지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그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인터하이에 괴로워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 고통을 어찌하지 못해 울먹였던 고등학생이 아니므로. 네가 열어준 가능성에 걸어보는 것이었다.
날은 나날이 맹렬하게 더워졌고 역에서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데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온갖 복잡한 생각은 갈무리해둔 참이었고, 나는 거의 머리를 비운 뒤 너와 동행했다. 전국대회의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으니까 확인해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앞섰다. 어쩐지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너는 경기장을 익숙하게 찾아갔고 덕분에 우리는 금세 착석할 수 있었다. 도쿄의 오렌지코트. 천장이 높다더니 확실히 이곳에서 경기하려면 몇번 경험이 있는 쪽이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 미쳤다. 경기장에선 선수들이 웜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저곳에 있었다면. 우리가 저곳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이 들어 저곳에서 카트를 밀고 들어오는 아오바죠사이의 모습을 잠시 그려보기도 했다. 우리도 이곳에서 영광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상상은 순간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경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그들의 경기가 기대되었던 것이다. 너는 내게 몸을 기울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학교는 작년에 우리 학교와도 경기했었다. 리베로가 유명해. 아직 2학년이기도 하니, 유스에 영입될 거라는 얘기가 있다. 저 학교는 친선경기도 많이 하고 경험도 풍부해서...”
너는 네가 아는 지식을 동원하여 코트의 풍경을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전국대회 경험도 많고 유스 경험도 있는 너는 선수진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그걸 듣고있는 기분은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네가 아는 세계를 나도 조금씩 알아갔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휘슬이 울리고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서버가 공을 올렸다.
경기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이쪽 코트를 구경하다 저쪽 코트를 구경하다, 그리고 네 설명을 듣고 눈에 띄는 선수를 주시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기에 몰입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대척점에 서 있던 너와 함께 인터하이를 구경하는 기분은, 놀랍도록 즐거웠다. 배구에 빠져든 순간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도 가끔은 미워한다는 사실도 중요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배구에서 헤어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코트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았다. 경기장 특유의 고조된 흥분이 몸을 휘감았다. 열기가 옮아왔다.
경기장을 나오니 멀리 늘어선 건물 틈으로 심홍색 빛줄기가 비쳤다. 내가 경기장 근방을 좀더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너는 선선히 응했다. 경기장의 흥분감을 쉽게 떨쳐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벌써 뒷정리를 다 하고 승합버스에 오르는 아이들도 있었고 다른 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낙담한 얼굴로 걸음을 질질 끄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터하이의 열기가 경기장 바깥에도 넘쳐나있었다. 인터하이의 주인공으로서 흥분감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은 분명 두고두고 아쉬워할 일이다. 그렇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내겐 새롭게 할 일이 있었으므로.
핸드폰 갤러리를 뒤져 너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에 입부해 처음으로 찍은 단체사진이다. 1학년들이 맨 앞줄에 앉아있고 중간엔 2학년들이 무릎에 손을 짚고 일렬로 서 있으며, 뒷줄에는 3학년들이 허리를 쭉 펴고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첫 번째 인터하이를 앞두고 기념삼아 찍었던 것이다. 3학년들은 인터하이까지만 출전하고 수험에 전념할 예정이었지만, 1학년인 내게 인터하이는 처음이었다. 맨 앞줄 한가운데에서 내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고 웃고 있다. 중고교 배구경력을 통틀어 가장 걱정이 없고 가장 자신만만하던 때의 얼굴이다. 강한 학교에 들어왔고, 선배들을 믿었으므로 이제는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꺾을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승리를 얻으리라 믿었던 인터하이에서는 그러나 다른 것을 얻었다. 영원한 여름의 열병. 그 해 여름은 내게 벗어지지 않는 멍에를 씌웠다. 너를 사랑했다. 또 미워했다. 기실 너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버린 이유란 다 핑계에 불과하다. 너를 사랑하는 데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름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내리쬐듯이. 그것이 본능인 것처럼. 너이기 때문에.
“이 무렵이었어. 널 사랑하기 시작한 건.”
날것의 진심을 그대로 고백한다. 내 마음을 전부 고백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여는 문장으로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웃었다.
여름의 인터하이. 널 미워하길 그만뒀을 무렵부터 내 짝사랑은 끝을 모른다. 수반되는 고통과 슬픔은 늘 나를 괴롭혔다. 이러다간 배구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두려워했었다. 결국에는 내 감정에 잡아먹힐까봐 그게 그렇게 겁났다. 그러나 늘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그림을 상상한다. 내 마음은 숯일 필요도, 얼음일 필요도 없었다. 너와 배구가 양립할 수 있었던 최초의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다. 너도, 배구도 온전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내 진심이다. 미움의 끝은 사랑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사랑과 고통과 증오 그리고 슬픔은 모두 스펙트럼처럼 이어져있다. 그 경계를 찾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테다. 한여름의 열기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기분.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 여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날 것만 같은. 우리의 여름. 그리고 해묵은 슬픔. 더위에 꼼짝없이 갇혀있는 동안은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믿게 된다. 너를 사랑하는 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을 생각한다. 왜 그토록 슬퍼했던가 생각한다. 나는 나의 아주 많은 부분을 희생하여 너를 사랑했고, 왜 꼭 그랬어야만 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결코 다시 겪을 수 없는 짝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너에게 고백하게 될 것이었다. 난 치열하게 너를 사랑했고, 내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고. 영원히 불탈 것만 같은 여름이 이 안에 들어있어 앞으로도 치열하게 너를 사랑할 것이라고. 그것이 내 사랑의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나아지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지만,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우린 서로에게 닿는 가장 빠른 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은 너에게로 향하는 길인 것이다. 나는 이제 운을 떼었을 뿐이다. 금세 땀이 들었다. 여전히 숨막히는 여름이었다. 무더운 해가 사정없이 내리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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