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유리로 도쿄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룸이었다. 응접실 천장은 껑충하게 높았고 열두 명은 족히 앉을 가죽소파엔 구김살 하나 없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공간이었다. 우시지마가 가을밤의 고요한 정적 속으로 몇 걸음 들어갔을 때, 불이 밝혀졌다. 달빛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은은한 조명이었다. 오이카와는 수트캐리어를 들고 성큼성큼 따라 들어와, 우시지마를 앞질러 침실로 들어갔다. 우시지마는 그를 따라가 문간에 서서 그가 움직이는 양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내일부터 우시지마가 입어야 하는 옷들을 꺼내어 옷장에 채워넣었다. 오이카와 역시 수트 차림이었다. 밤색 머리칼을 돋보이게 하는, 짙푸른 빛이 감도는 옷감. 살짝 여유있게 맞춘 옷은 오이카와의 활동성을 고려한 것일 테다. 재킷은 옆이 틔어있어 경쾌한 인상을 주었다. 오이카와는 길고 날씬한 다리로 침대와 옷장을 바삐 오갔다.
“내일 입을 건 따로 빼둘 테니까.”
말하며 오이카와는 수트 한 벌을 옷장 문에 걸었다. 팔을 뻗느라 위로 올라간 재킷 밑으로 흰 셔츠가 들춰보였다. 셔츠는 오이카와의 허리띠 속으로 가지런하게 들어가 있었고.
“오느라 수고했다. 그럼 쉬어.”
오이카와는 빈 수트케이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침실을 나섰다. 조명을 받은 안경테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눈이 나빠졌나?”
우시지마가 불쑥 물었다. 오이카와는 걷다 말고 우시지마를 보았다.
“보면 몰라? 안경 썼잖아.”
“얼마나 나빠졌길래.”
“......뭐 그런 걸 물어. 대답해야 돼?”
“......”
다시금 우시지마는 할 말을 잃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이카와에게선 아무런 당황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시지마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안경을 밀어올린 뒤 우시지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넌 여전한 것 같네.”
“......잠깐 이야기 좀 해.”
“무슨 얘기?”
궁금하다는 듯 오이카와가 반문했다. 이쯤 되어서는 우시지마도 기가 찼다. 얼마 만에 만나는 사람인데, 무엇이 되었든 할 말이 하나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마침 응접실 한쪽에 미니 바가 보였다. 우시지마는 즉시 그쪽으로 향했다. 냉장고에 시원하게 보관된 샴페인을 하나 골라 잔에다 따랐다. 두 잔을 따라 한 잔을 오이카와에게 주니, 오이카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나 운전해야 돼.”
“......”
거절은 나긋했다. 그래서 더 권할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두 잔 모두 바에 덩그러니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많지 않나. 왜 네가 여기에 있는지부터 해서, 왜 너는 놀라지 않는지...”
“...그렇게 됐다고밖에 할 말 없어. 이쪽 일 시작한 지는 좀 됐어. 이번 클라이언트가 너일 뿐이고.”
“배구는 관뒀나?”
“......”
이번에 말수를 잃은 것은 오이카와 쪽이었다. 오이카와는 별안간 입을 꾹 다물더니 그때까지도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수트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잠깐 만에 우시지마를 바라보는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또한 차가워졌다. 그런 오이카와의 모습마저 우시지마는 곧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고. 오이카와는 잠시 우시지마의 발치를 바라보았다가 입술을 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바쁘게 살았어.”
“......”
“뭐... 말하자면 긴데. 우리가 그런 이야기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냐.”
“......”
오이카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우시지마는 까끌한 입을 벙끗거리기만 했다. 거의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부르는 이름이어서일까.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빙그레 웃었다.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건 사람좋게 웃는 게 아니라, 힐난하는 얼굴이다.
“지금 망설였지, 내 이름 부르는 거.”
“......”
“...그런 사이라는 거지.”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수트케이스를 다시 어깨에 들쳐 멨다.
“내일 아침 일곱 시 반에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옷 입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호텔을 나섰다. 우시지마는 응접실에 남겨진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애꿎은 샴페인은 잔 속에서 기포를 퐁퐁 터뜨렸다.
*
서른이 다 된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날 내도록 오이카와를 지켜본 우시지마의 감상은 그랬다.
어제의 요란한 연찬회를 시작으로 프로모션이며 사인회 같은 행사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스케줄은 사전에 협의되어 있었고 우시지마는 동의했기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거나 시간을 어기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일정들을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서 전담 에이전트가 고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에이전트가 오이카와 토오루일 거라곤, 우시지마의 상상력이 아주 풍부했더라도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지 않은가. 가을에 벚꽃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오이카와는 숙련된 프로였다. 지난밤의 숨막혔던 재회는 없었던 일처럼 우시지마를 철저히 클라이언트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날이 밝고, 오이카와는 약속한 정각에 찾아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시지마의 넥타이를 손질하고, 어울릴 거라며 넥타이 핀까지 꽂아주었다. 아침엔 일식으로 준비했다면서 종이가방에 든 것들을 테이블에 벌였다. 김이 피어나는 밥과 따뜻한 장국과 약하게 간을 한 반찬들. 우시지마가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으니 오이카와는 그의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나 오늘 네 시 반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픽업해온 거거든. 너 때문에 늦어지면 가만 안둘 줄 알아.”
오이카와가 엄포를 놓았다. 얼떨결에 밥상 앞으로 떠밀린 우시지마는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세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니 아직 오전 7시 50분이었다.
“좋았어. 4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해.”
세단이 출발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흘끗 보았다. 오늘은 어제처럼 정석적인 수트 차림은 아니었다. 재킷 속에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정 티를 받쳐입었다. 신경써서 차려입기는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옆머리를 단정하게 넘겼을 뿐인데 우아했다. 이래서야 사진 한 장 찍히지 않으면 아쉬울 거라고,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오늘은 안경을 안 썼군.”
“밤에만 껴.”
“응.”
우시지마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이카와가 곁눈으로 우시지마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좋은 때가 아닐 것이다.
일정은 예정대로 폭풍처럼 몰아쳤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우시지마에게 고국에 돌아온 소감이 어떻느냐고 물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걸 느낄 시간도 없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행사장에서 행사장으로 옮겨다니는 일만도 몹시 바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의 일정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오이카와가 철저히 그를 에스코트한 덕분이었다. 기실 스케줄 따위야 당초부터 우시지마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우시지마는 하루종일 오이카와를 관찰할 시간만 얻은 셈이었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더 자란 듯한 키며 흉없이 하얀 피부는 군중 가운데서도 독보적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여전할까. 센다이 체육관에서 혼자 튀어보였던 것은 결코 우시지마의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얼굴에 젖살이 빠져 턱선이 갸름해진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일까.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 인터뷰어를 바라보라며, 입을 벙끗거리며 주의를 주었지만 우시지마의 눈길이 자꾸만 그를 향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모든 감상을 이실직고한다면 오이카와는 버럭 화를 낼 것이다. 우시와카쨩이라고 소리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우시지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인터뷰어는 우시지마가 자신의 말에 호응한 것으로 착각했는지, “정말 그렇죠? 하며 기뻐했다.
하루가 다 저물어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우시지마의 앞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났다. 계기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우시지마와는 조금 다른 궤도를 걸어 똑같이 나이를 먹은 오이카와가 그의 팔을 이끌고 있다. 오래된, 그러나 바래지 않게 관리된 다락방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모든 것이 여전하다.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다. 어쩌면 마지막에 그들이 느꼈던 감정까지도 오롯하게.
저녁이 되어서야 우시지마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수첩에 적어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짤막한 통화를 마쳤다. 다시, 세단엔 단둘뿐이었다.
“정신없어 죽는 줄 알았네.”
오이카와가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우시지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제는 바빴나? 나를... 마중나오려고 했다고.”
“응, 급한 일이 생겨서 대타 좀 썼어.”
“괜찮던데, 그 친구.”
“내가 키운 후밴데 당연하지.”
“이쪽 일은 언제부터 했나? 오이카와...”
“가자, 이번엔 너희 어머니 뵈러 가야 돼.”
오이카와가 말을 끊었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였다.
오이카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끝으로 우시지마를 차에서 내보냈다. 우시지마는 문이 닫힌 세단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해가 졌고, 선팅된 유리 너머로는 오이카와가 보이지 않았다.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우시지마는 옷깃을 추스르며 회사 로비로 들어갔다.
“오이카와 군 말이 딱 맞네. 정시에 도착했어.”
어머니가 처음 한 말은 그것이었다. 우시지마가 회장실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막 허브티를 우리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외투를 벗으며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인사하고 다녔니?”
“무슨.”
“안부같은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단 얼굴로.”
“......”
딱히 어머니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련히 알아서 잘 지내시겠지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 우시지마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머니는 우시지마 몫의 차를 내주었다.
“오이카와를 아세요?”
“알다마다. 오이카와 군이 우리 재단 선수들 여럿 봐줬지. 이번에도 내가 부탁했어.”
“어머니가 붙여주셨다고요.”
우시지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퇴식은 언제로 잡을까.”
“......”
“올해? 아니면 내년 초? 올 겨울까진 기다리마. 네가 양보했으니 나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아직 결정 못 했습니다.”
“그렇다해도 시즌은 다 끝나지 않았니? 뉴스를 언제 발표하느냐만 남았어.”
“압니다.”
“...네가 망설이도 하는구나. 출국하기 전에 매듭지어라.”
“......”
“이것만 마시고 일어서자, 저녁 먹으러.”
대화는 일방적이었다. 불쾌하진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숙고한 내용이고, 어머니는 기정된 사실을 일깨워준 것뿐이므로. 어머니는 UJ그룹의 헤드다. 우시지마 일가는 수십 년 전 UJ물산으로 시작해 회사를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주요 사업분야는 무역과 중공업이고, 스포츠재단을 운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십 대와 이십 대를 배구선수로 활동하길 고집한 외아들 탓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시지마 일가의 외아들이 배구를 하지 않았다면 UJ그룹은 체육계와는 일절 연이 없을 터였다. 집안에선 우시지마가 선수생활을 은퇴하는 즉시 가업을 이을 것을 조건으로 그에게 자유를 허락했다. 그리고 그 약속된 시기가 이제 거의 도래했다. 우시지마는 자신이 평생 활약했던 분야의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었다. 어머니는 우시지마에게 오랫동안 양보했다고 말했고, 우시지마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어머니는 남은 차를 쭉 들이켰다. 우시지마가 어머니를 모시고 회사 밖으로 나갔을 땐 오이카와가 세단을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가타부타 말은 필요 없었다. 오이카와는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하루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짜맞춘 듯 굴러갔다.
“오이카와 군도 같이 식사하지? 아직 식사 안 했잖아?”
“저도 말입니까?”
어머니가 오이카와에게 동석을 제안한 것이 그날의 유일한 변수였다. 오이카와는 한 번 반문했을 뿐 웃으며 그들을 따랐다. 그는 우시지마 여사를 위해 의자를 빼주는 센스까지 있었다.
“그러고보면 둘이 동갑이랬지?”
어머니가 말했다. 우시지마를 향하여 은근히 웃는 표정에는, 네가 이만한 센스를 갖추려면 백 년은 걸릴 거라는 놀림조가 섞여있었다. 대신해서 오이카와가 그렇다고 대꾸했다. 우시지마는 말없이 웨이터가 내어온 와인을 마셨다.
오이카와야 어색함을 모르는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성격을 떠나서, 어머니는 사회생활 경력이 우시지마의 나이보다 많은 것이다. 그 자리를 불편해하는 건 우시지마가 유일했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므로. 평생 만날 일 없던 세 사람이 원탁에서 식사라니. 어머니와 오이카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쌀쌀하지만 낮에는 따뜻한 날씨에 대해서. 우시지마 여사의 생일에 오이카와에게 선물했던 차에 대해서. 우시지마의 남은 스케줄에 대해서.
“어제는 미야자와 선수에게서 답례품이 왔어. 덕분에 일본에서 잘 쉬고 간다고, 고맙다고 하는구나.”
“잘 됐네요.”
“근데 미야자와 선수를 에스코트한 건 내가 아니라 오이카와 군이잖아? 그래서 그거 그대로 오이카와 군 사무실로 보냈어요.”
“아니, 회장님.”
“착불 거부로 해서 보냈으니까 사무실 식구들이랑 나눠먹어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이카와가 환하게 웃었다.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순진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이었다. 어머니는 저 꾸밈없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상황에는 갈수록 익숙해져야 하는데, 우시지마는 갈수록 낯섦을 느꼈다. 와인이 자꾸만 들어갔다.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어머니도 오늘은 기꺼이 와인을 들이켰다. 몇 년 만에 돌아온 아들은 정작 목석처럼 앉아있고 오이카와가 어머니의 대화상대를 하고 있었다.
“오이카와 군에게는 항상 신세를 져.”
“신세는요, 일감 주시는 게 어디예요.”
어머니가 치하하면 오이카와가 받아치는 식이었다. 둘은 잡담하는 것 같았으나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했고, 필요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가식이라고 생각하기엔 정말로 둘의 사이가 퍽 가까워 보였다. 우시지마가 먼저 언급한 화제라곤 오이카와의 안경에 대한 것이었다.
“저녁인데 안경을 안 썼군.”
“차에 뒀지.”
오이카와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한 손에 턱을 괴며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이카와 군, 그건 언제부터였어?”
우시지마는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간다. 테이블에 가지런히 올라있는 오이카와의 왼손으로. 그리고 그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금속으로.
“아, 이거요. 이제 2년 됐습니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손을 펼쳤다.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었다. 그의 반지가 샹들리에의 빛을 온통 빨아들였다.
시라이시가 세 사람을 마중나왔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언제 시라이시에게 연락을 넣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조수석엔 오이카와가, 뒷좌석엔 어머니와 우시지마가 나란히 탑승했다. 세단에는 바흐의 평균율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심야의 도쿄를 내달리는 자동차엔 고양된 숨결과 피아노의 선율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어머니를 자택에 모셔다드리고, 우시지마의 호텔에 도착하니 열한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자정도 안 된 시각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우시지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일은 뭘 입어야 하지.”
그예 오이카와가 돌아보았다. 꽤 술을 마셨던지 오이카와가 나른한 시선으로 눈을 깜박이더니, 시트벨트를 끌렀다. “먼저 가.” 그가 시라이시에게 지시했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어쨌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호텔룸까지 동행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님에도 로비엔 호텔 직원뿐이었고,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오이카와가 34층 버튼을 눌렀다. 둘은 엘리베이터 난간에 엉덩이를 기대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의 살구빛 조명과, 바깥건물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오이카와의 얼굴에 어지러이 아른거렸다. 엘리베이터는 도중에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3401호 객실 카드를 꺼냈다. 우시지마가 잠자코 기다리자 오이카와가 문을 열었다. 우시지마는 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말은 필요치 않았다. 오이카와는 느린 걸음으로 바에 다가가서 술을 골랐다. 우시지마는 재킷을 벗었다. 핀을 빼고, 넥타이를 가볍게 끌렀다. 목의 맨 끝까지 잠그고 있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오이카와는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중 고심하다가 레드와인을 골랐다. 샤또 페르튀스의 상표가 얼핏 보였다. 오이카와는 두 잔을 따르고, 한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실내에 조명이 밝혀진 탓에 유리창으로 오이카와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오이카와가 유리에 기대어 섰으므로, 우시지마는 나머지 한 잔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면유리 너머의 야경은 아찔했다. 오이카와와는 불과 한 걸음 거리다.
“결혼반지인가.”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도 있을까 생각했다. 싫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밀려오는 해일을 바라보며 싫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건 우시지마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시지마의 의사는 개입되지 않은 과거다. 오이카와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십 년이나 지났잖아.”
“그렇지만.”
“연락이라도 하고 지냈으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진 않았을걸.”
“......”
분명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우시지마는 아직 생생하게, 아프도록 기억한다. 그럼 잘 가라며 휑하니 돌아서던 오이카와의 모습.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작별다운 작별도 못해봤다.
우시지마는 오래된 다락의 사다리를 오른다. 먼지가 곱게 쌓인 기억의 다락이다. 미야기의 시간들을 단편적으로 떠올린다. 오이카와 토오루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코트 위에선 열정으로 빛나고 코트를 벗어나는 순간엔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의 파트너와 함성을 지르거나 후배를 다정하게 격려했다. 저를 만나면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미워하는 모습마저 이렇게 솔직한 사람에겐 모순이 없을 것 같았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미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학생이 되던 해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오이카와와 만났다. 그 6년간 오이카와를 짝사랑했다.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의 증오마저도 사랑했다. 아마도 그는 오이카와를 향하여 뻗는 갈증에는 끝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연애한 대가는, 가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날엔가 오이카와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우시지마에게 고백했다.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어떻게? 왜? 그러나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마주안았다. 그거면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 봄고 예선이 끝나고 둘은 교제했다. 우시지마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믿기 힘든 일을 꼽으라면 단연 그것이다. 데뷔년도에 신인 스파이커 상을 수상했던 일도, 2년의 슬럼프를 딛고 우승트로피를 탈환했던 일도 견줄 바가 아니었다. 자신을 증오했던 사람이 애정을 보인 일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건 꿈이 아니었던가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만큼 기적적이었다. 오이카와와 잠시간이라도 연애했던 일은. 그런데 왜 헤어졌더라? 우시지마는 멍하니 생각한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셔츠깃을 쥐곤 만지작거렸다. 왼손이었다. 오른손엔 와인잔을 들고 있었으므로. 반대로 우시지마의 오른손이 비어 있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쥐었다. 손가락 아래에 서늘한 금속이 느껴졌다.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서 헛돌았다.
“십 년 전이랑은 달라졌어. 나도, 너도.”
“그래도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과거 말이지.”
오이카와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고양된 숨결의 온도가 느껴졌다. 아주 가까이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을 텐데, 처음 느끼는 것처럼 낯설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는 온통 친절하고 낯선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부드럽되 가혹했다.
“이게 결혼의 증거라면,”
우시지마의 손 안에서 오이카와가 손을 조금 뒤틀었다.
“우리가 사귀었던 증거는 어디에 있지?”
우시지마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 흔한 커플링 하나 맞추지 못할 만큼 짧게 교제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오이카와가 턱을 들었다. 우시지마의 입술에서, 코로, 눈으로 시선을 올린다.
“증거가 없으니 기억할 수가 있어야지.”
“......”
“키스도 했던가?”
“.....”
“섹스도 했던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나는.”
서서히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단절되었던 시간의 그림자가 오이카와 얼굴에 짙게 깔렸다. 비단 달이 어두운 밤이라서가 아니었으리라. 저녁 내도록 마신 와인 탓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시지마는 무얼 탓해야 좋을지 몰랐다. 오이카와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았다. 그의 오른손 밑에는 아직 오이카와의 반지가 느껴졌다. 오이카와를 향하여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오이카와가 경멸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때리려거든 때리고 화내려거든 화내라고. 오이카와는 그러나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않았다. 물론 오이카와가 물러섰다 하더라도 우시지마는 그에게 키스했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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