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시의 말대로 조찬회에는 온갖 인사들이 다 참석했기 때문에 간단히 목례를 주고받는 데에도 시간이 훌쩍 갔다. 조찬 테이블에는 우시지마 바로 옆자리에 오이카와가 동석했다. 그는 계속해서 우시지마에게 인사들의 이름과 직함을 속삭여주고, 연회에 누가 초대되었는지 파악하고, 인사말을 메모하는 등 본연의 일에 충실했다. 재빠르게 장내의 흐름을 읽는 센스는 배구를 관둔 후에도 빛바래기는커녕 훨씬 첨예해졌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코트 바깥에서도 오이카와 토오루인 것이다. 조찬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일어나놓고도 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초조했는지 알 만했다. 이정도 준비하려면 적잖은 여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생선요리가 서빙되었지만 둘은 거의 먹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던 탓이고, 우시지마는 단순히 식욕이 들지 않았던 탓이다. 생선의 튀김옷을 포크로 벗겨내며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지금 토비오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화를 내겠지.
계속 딴생각에 빠져있는 우시지마에게 오이카와는 수시로 주의를 주었지만, 우시지마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조찬회 끝물이 되었을 때에도 오이카와는 주위에 누가 다가오는지 신경쓰며 물만 들이켰는데, 업무중이었으니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한 건 당연하다. 조찬회에서 우시지마의 관심사는 오로지 오이카와였다. 그는 물잔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오이카와의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오이카와는 그런 우시지마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볼룸이 마침내 해산하는 인파로 어수선해졌을 때에야 오이카와는 한시름 놓았다. 그는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 반. 그러곤 우시지마를 데리고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다. 장내가 아직 소란했으므로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허리를 가볍게 받치고 방향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오이카와는 얼굴에 호의적인 미소를 띄운 채 저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시라이시한테는 다 들켰겠지. 어젯밤에 눈치챘을 거야.”
여전히 앞을 본 채로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래도 입 무거운 애니까 괜찮겠지. 미야기 친구라고 하면 대충 이해할 거고.”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거짓말하자는 거 아냐. 필요 이상으로 말하기 싫은 거지.”
오이카와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꾸했다. 우시지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오이카와는 작게 짜증을 냈다.
“키스했던 사이라고 광고를 할까 그럼?”
“...기억하는군?”
“당연하지,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었어.”
“......”
그런데 그렇게 취한 것처럼 행동했느냔 말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가만히 그의 키스를 받던 오이카와의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말이다. 우시지마는 그러나 여기서 오이카와와 따져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고 있다. 오이카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해두는데, 난 어디 가서 너랑 아는 사이라고 자랑한 적 없어. 아는 선수라고만 했지 미야기 시절은 입도 벙끗 안 해. 너희 어머니한테도 거의 말씀 안 드렸어.”
“왜 그렇게까지 하지?”
“쓸데없이 친한 척 하는 것 같아서.”
오이카와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 대답이 얼마나 잔인한지 오이카와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클라이언트와 매니저 관계이기 때문에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다. 아무리 우시지마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우시지마는 다시금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물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나?”
“다음은... 어떻게 할래? 3시까지 스케줄 없는데.”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한테 묻지 말고. 보통 이런 경우는 호텔에 가서 쉬거나, 스파에 가거나, 아니면 관광코스를 추천해달라고 하거든. 요전에 만났던 외국인 선수는 신사 구경 시켜줬더니 좋아하던데.”
오이카와가 손가락을 꼽으며 설명했다. 우시지마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저편에서 그들의 세단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라이시였다. 그를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시라이시 말이, 도쿄는 단풍이 절정이라던데.”
오이카와가 돌아보았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듯,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삼십 분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오모테산도였다. 내내 투덜거리던 오이카와는 뚱한 얼굴로 우시지마를 넘겨다봤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됐으니까 호텔로 돌아가자고 해도 돼.”
“번복 안 한다. 내려, 오이카와.”
“파파라치한테 찍혀도 내 탓 아니다?”
“알았다.”
“거 참, 사람 많은 데 싫어하면서 왜 여길 오자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오이카와는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시라이시는 씩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오모테산도는 단풍이 한창이에요. 쇼핑하거나 간단히 먹기에도 좋고요, 여기 와서 별로라고 하는 분 못 봤습니다.”
시라이시의 결정타였다. 우시지마가 고맙다고 인사한 후 차에서 먼저 내리자, 오이카와도 덩달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시라이시는 둘을 내려주고 미련없이 차를 끌고 가 버렸고, 우시지마는 멀뚱히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가을 한낮의 볕은 몹시 따뜻했다. 오이카와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한숨을 푹 쉬더니, 마지못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다음부턴 그냥 묻지를 말아야겠다.”
그래서 둘은 난데없이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게 된 것이다.
지난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던 일 따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오이카와와 일없이 산책하면서는 세상에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다고 느껴졌다. 몰아치던 일정 사이에 돌연 찾아온 휴식은 우시지마로 하여금 상황을 온전히 즐기도록 해주었다. 외투를 여미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날은 따뜻했고, 도로를 따라 늘어선 단풍나무는 노랗고 붉은 숲길을 이루고 있다. 채도 높은 이파리 사이로 맑은 빛이 쏟아져 그들의 머리와 어깨를 온화하게 데워준다. 오이카와와 일없이 산책하는 일도 꼭 십 년 만이었다. 언덕을 따라 잠시 거닐었을 뿐인데 오이카와의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 보였다. 불평을 쏟아내던 입을 다물고 머리 위의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뭇잎으로 만든 터널 속을 탐험하는 기분. 마른 낙엽을 밟고 걷기만 하는데도 좋았다. 어쩐 일인지 오이카와가 걱정한 것처럼 인파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우연히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모습을 보았지만, 조용히 지나쳤다. 다행히 그를 따라와 사인을 해 달라거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오이카와와 다시 만나 가을의 오모테산도 힐즈를 산책하는 날이. 우시지마는 쇼윈도에 비친 둘의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이 사이즈가 같은 외투를 입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여러 차례나 흘끗거린 다음에야 그것이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없이 걷다가 안착한 곳은 어느 카페였다. 오이카와는 자기가 아는 곳이라며 우시지마의 팔을 끌었다. 빌딩 입구가 으슥한 안쪽에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들에겐 득이었다. 접근성이 다소 어려운 탓인지 대로에 위치하면서도 카페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홀에서 등지는 구석자리에 앉히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뭐 마실래?”
“차 종류 아무거나, 부탁한다.”
좌석은 안락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였기 때문에 벌써부터 일어나기 싫다는 생각도 드는 자리였다. 몇 분 후, 오이카와는 자신이 직접 트레이를 들고와서 우시지마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시지마의 어깨 너머로 홀을 쓱 살피는 그의 모습에 우시지마는 작게 깨달았다. 오이카와가 이 자리를 선택하고, 서버가 가져다줄 음료를 직접 가져온 것은 자신을 배려한 결과라고. 오이카와가 그의 손색없는 수행원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오이카와가 말했다. 과일이 잔뜩 올라간 팬케이크와 속이 꽉 찬 에그 샌드위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 먹어두지 않으면 배고파서 못 견뎌.”
변명처럼 오이카와가 덧붙였다. 우시지마는 작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찬회에서 막 나올 때보다 누긋해진 분위기를 느낀다. 오이카와가 얼마 먹지 못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
오이카와는 잠시 액정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우시지마는 그의 눈길을 따라갔다.
토비오.
아침부터 저 이름을 몇 번이나 들었던가 생각한다. 아니 이번엔 들은 게 아니라 읽었다고 해야 할까. 너무 자주 접해서 꼭 우시지마도 아는 사람의 이름인 것만 같다. 우시지마의 기분이 조금 구겨졌다. 오이카와의 허전한 왼손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저 왼손으로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인다.
“여기 자주 왔었나 보군?”
그래서, 우시지마는 시답잖은 말로 오이카와의 주의를 흩뜨린다. 오이카와는 반사적으로 수신거부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자주는 아니고, 혹시 접대할 때 필요할지 몰라서 찾아뒀던 데야.”
오이카와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그러곤 우시지마가 왼손으로 쥐기 쉽도록 찻잔을 옮겨주었다. 서비스직이 천직인 것처럼, 오이카와의 행동은 뭐든 자연스러웠다. 열여덟과 서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을 뿐. 배구와 서비스직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우시지마가 알지 못하는 오이카와의 시간을 생각하면 십 년은 실로 장장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십 년이 지나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여전하지만, 우시지마는 그의 극히 일부분을 이해할 뿐이다. 오이카와에 관해 알고 싶은 마음은 이 순간에도 가득하다. 우시지마는 그들이 그간의 사연을 궁금해 할 사이는 되지 않는가 생각했다. 그러나 우시지마가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오이카와가 왜 사적인 이야기를 입에도 올리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지난밤 도발했던 것은 모순이 아닌가. 우시지마는 혼란스러워졌다. 왜 그랬을까. 오이카와는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기는 한 걸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이대로 출국해야 한다면, 우시지마는 다시 먹먹한 시간을 나야 할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그러나 빵을 먹는 데 여념이 없었고.
“어?”
오이카와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금세 표정을 굳히며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지가 없어진 것을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추궁하듯이 우시지마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짙은 밤색 눈에 감돌던 누긋한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지, 어딨어?”
“...어젯밤 네가 뺐다.”
“......”
“잠결에 빼던걸.”
우시지마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오이카와는 의뭉스런 얼굴이 되어 제 손가락과 우시지마를 번갈아 보았다.
“네 겉옷 안주머니에 확실하게 넣어뒀다.”
“......진짜지.”
오이카와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어제는 그렇게 취하지도 않았었다는 말은 아무래도 객기인 듯했다. 그제서야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왜 자신에게 반지의 행방을 묻는지 의아했지만, 말해봐야 자신의 잘못만 바른 대로 고하게 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다른 손으로 반지가 끼어 있던 자국을 더듬었다. 그렇게나 소중한 반지였을까.
“........”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입맛이 떨어졌는지 더는 포크를 들지 않았고, 둘은 한동안 애꿎은 창밖만 내려다보며 차만 마셨다. 오이카와에겐 어떨는지는 몰라도 우시지마에겐 끝도 없는 터널 속에 갇힌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토비오?”
끝내 그 토비오란 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에게서 최대한 고개를 돌리고 작게 통화했다.
“...미안, 다음에 같이 가. 오늘 시간 내기 힘들어. 어딘지는 왜 물어. 아, 알겠다니까...... 그래.”
......그런 말들. 아무리 무딘 우시지마라도, 오이카와가 토비오란 사람과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통화는 짧았다. 오이카와는 남은 차를 모두 마셨고, 우시지마는 여전히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우시지마, 너 진짜... 은퇴할 생각인가 봐?”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도리어 우시지마가 놀랐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아깝잖아! 아직 전성기고- 아, 이런 얘기는 질리도록 들었겠지만 말야. 어쨌든 진짜 놀랐어.”
“내 소식을 알고 있었나?”
“모를 수가 있어? 난 명색이 스포츠 에이전시 직원이고, 그간 너 접대할 준비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꼭 그거 아니라도, 너 입국했을 때 사람들 반응 보면 알지 않냐?”
오이카와는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목소리는 전혀 날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시지마는 안심하며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불공평하지 않나. 나는 네 소식을 모르는데 너는 내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거.”
“......”
이번엔 오이카와의 말문이 막힌 듯했다. 오이카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여기 와서 한 번도 운동 안 했지, 너.”
“응, 시간이 없기도 했고.”
“시간이야 만들면 있는 거잖아? 근데 내가 궁금한 건... 은퇴하면 어머니 회사로 들어갈 생각이지? 그러니까 행사니 연회니 하는 데에 열심히 얼굴 비추는 거고.”
“꼭 그래서는 아니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 이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의는 아니라는 거네.”
“내가 이런 일을 좋아하는 걸로 보였나? 오이카와.”
“하긴 그래, 천하의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사업가라니. 나는 네가 배구만 하다 죽을 줄 알았거든.”
오이카와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꾸밈도 스스럼도 없이 편안하게 웃는 것에, 우시지마에게까지 덩달아 웃음기가 번지는 듯했다. 그는 아주 잠깐 망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네가... 계속 배구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퍽 진지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오이카와의 웃음이 멈칫했다. 우시지마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국가대표 엔트리 명단에서 가장 먼저 네 이름을 찾곤 했다. 비록 명단에 올라있지 않아도, 실업팀에서 뛰고 있거나, 배구교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너는 배구를 하고 있을 거라고.”
“......”
우시지마가 말하는 동안 오이카와의 웃음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얼굴엔 어떤 경멸의 흔적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우시지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우시지마는 그의 속을 읽을 수 없지만, 토비오가 누군지도 모르고 반지가 어디서 난 건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은 밀어붙일 때라는 것.
“오랫동안 생각했다. 너를, 너의 배구를...”
우시지마가 말했다. 오이카와의 입술은 다물린 채 어떤 대꾸도 들려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아직은, 아직은 말이다.
가을하늘은 오이카와의 얼굴에 따스하고 밝은 빛을 내려주었다. 오이카와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밝은 갈색으로 빛났고 홍채는 그 안에 새겨진 우주까지 드러낼 만큼 명징했다. 이토록 환한 사람인데. 빛이 없어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인데. 정작 오이카와는 무거운 공기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가 우시지마의 옷을 입고 볕을 쬐고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좋았다. 우시지마의 시선은 오이카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오이카와에게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게 하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인력이 우시지마에게 얼마나 거대하게 작용하는지 까맣게 몰랐다. 아무래도 좋았다. 오이카와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최초부터 끝을 알고 시작한 관계였다. 고교 막바지, 우시지마는 폴란드의 작은 구단에 입단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오이카와는 국내 대학의 체육학과에 진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꺼낸 화제는 그것이었으므로 우시지마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감정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들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의 순간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에 서로 끌어안은 것이고, 최초의 순간들을 나눈 것이다. 헤어짐이 예정된 관계라 할지라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고백했던 일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우시지마는 그랬다.
하지만 오이카와도 그랬을까. 오이카와 역시 끝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는 별개인 것이다. 그들의 연애를 멈춰세운 건, 우시지마의 출국도 오이카와의 진학도 아니었다.
우시지마의 눈앞에 서른이 된 오이카와가 앉아있다. 오이카와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던 우시지마는 그의 목덜미에서 작은 분홍색 자국을 발견한다. 끝까지 채운 단추 속에 숨어있어 발견하지 못할 뻔 했지만, 셔츠깃 안쪽에 지난밤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다. 우시지마는 그러나 말을 아꼈다. 틀림없이 오이카와가 화낼 것이다.
“이렇게 있으니 오이카와, 우리가 사귀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왜 갑자기 옛날 얘기를 하세요.”
“그래도 그때 기억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나는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왜 네가 나를 만났는지...”
“십 년이나 지난 일이야. 잊어버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잊은 것처럼 살았으면서 뭐.”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엔 힐난이 아니었다. 그의 귓바퀴가 주홍으로 물든 것은 비단 가을볕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날의 마지막 일정은 이른바 경영인의 밤이었다. 소탈한 이름은 그저 구실이고, UJ그룹 간부들을 포함하여 동종업계의 기업가들, 말하자면 사업수준이 비슷한 사람들이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 우시지마의 어머니는 그에게 자신의 부하 하나를 비서로 붙여주었다. 기업경영에 관한 내용을 전달해야 했으므로 오이카와가 수행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장소는 H그룹 호텔의 볼룸이었다. H그룹은 국내 호텔사업의 초창기부터 사업을 운영해온 정통성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명성을 키워가는 그룹이었다. 우시지마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예비 사업가라는 말도 아까울 만큼 회사 일에는 문외한이었다. 그가 회사일을 익히려면 족히 몇 년은 걸릴 테지만, 이 자리를 빌어 서로 눈도장을 찍어두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우시지마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우시지마가 국내에 들어와서 쉼 없이 해온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사를 건네고 술마시는 일에는 우시지마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는 단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볼룸의 한가운데, 백 년 전 프랑스에서 귀하게 들여왔다는 샹들리에는 건재했다. 높다란 천장 아래에서, 그리고 유리잔 끝에서 영롱하게 산란하는 빛들은 파티에 우아한 정취를 더해주었다. 어머니의 비서는 H그룹의 창립사와 함께 샹들리에에 얽힌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말씨가 단정하고 군더더기없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도, 시라이시도 아직은 운동선수인 우시지마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시지마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아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던 오이카와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 따름이었다. 왜 자신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면 끝내 만족하지 못하는지 생각했다. 중고교시절에도 그렇지 않았는가. 우시지마는 처음부터 오이카와가 자신의 세터이길 원했고, 그와 함께 코트에 서길 꾸준하게 소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행기를 타던 순간에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들의 목표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시지마가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오이카와의 소식은 감감했고, 실망하여 리그로 떠났다가 또 시간이 한참 지나 귀국하는 사이에 이십 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 순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포기했다.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또 어떤 것은 아프도록 여전하다. 우시지마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어찌할 수 없었던 것들. 다시, 우시지마는 여전히 오이카와 생각만 할 뿐이다. 오이카와 토오루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이 순간에도 시간은 무연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몇 시간 떨어져있는 사이에도 오이카와가 보고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겨우 일주일짜리 일정이었고, 나흘 가량 지나면 우시지마는 구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우시지마는 자꾸만 소매를 들춰 시간을 확인했다. 우시지마가 초조해하는 사이에 성큼 움직여있는 시곗바늘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시라이시가 귀갓길을 수행했다. 오이카와는 일이 있어 회사에 남아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라이시 씨, 오이카와의 후배라고 했죠.”
“네.”
시라이시가 대꾸하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었고, 세단은 부드럽게 정차했다. 우시지마는 앞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를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5년 정도 됐습니다.”
“그러면, 오이카와가 왜 배구를 그만뒀는지 압니까?”
“네? 그건...”
시라이시가 말꼬리를 흘렸다. 그는 신호가 바뀌지 않는지 바깥을 주시하는 척 했지만, 우시지마는 그것이 대화를 피하고자 하는 시늉이라는 걸 알았다. 우시지마가 말없이 바라보니 시라이시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 입으로는 말씀 못 드립니다.”
“오이카와가 비밀로 하라고 했습니까?”
“......”
시라이시는 입을 꼭 다물었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수긍이었다.
“그러면 오이카와에게 오늘 무슨 일정이 있었는지, 그것도 비밀입니까?”
“......”
“한 가지는 대답해주시죠.”
“저기 우시지마 씨, 그게... 그냥...”
이제 시라이시는 거의 울상이었다. 애꿎은 시라이시만 두 사람 사이에서 추궁당하게 생겼다. 그러나 때마침 뒤에 서 있는 차량이 가볍게 클랙슨을 울렸다. 신호가 바뀐 것이다. 시라이시는 잠깐 동안 참았던 숨을 토했다. 우시지마는 꿋꿋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만 대답해주시면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
“약속하겠습니다.”
“.........”
“제가 토오루에 관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인터넷에 검색 열심히 해 보시면 기사가 나올 겁니다. 오이카와 토오루에 관한...”
마지못해 시라이시가 말했다. 이어 그는 지방지의 이름을 하나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자괴감이 드는 표정까지 짓는 것에, 우시지마는 얼마간 미안함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오이카와 선배와 약속했단 말입니다. 절대로 말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제가 알려드렸다고 하시면 안 돼요.”
“그 약속이 뭔지는 몰라도, 시라이시 씨가 말한 건 아니죠. 힌트만 조금 준 거지.”
우시지마가 대답했다. 그래도 시라이시는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우시지마가 더는 추궁하지 않았으므로 세단은 침묵에 빠졌다. 시라이시는 그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오디오를 틀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으로 시작하는 사운드트랙이 재생되었고, 우시지마는 즉시 핸드폰을 찾아 오이카와 토오루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간 그의 이름을 검색하지 않아본 것은 아니었다. 메인포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고, 결과가 없는 것에 실망하여 인터넷을 끄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서가 붙었다. 열심히.
그리고 15분 뒤, 세단은 우시지마가 묵는 호텔에 도착했고, 우시지마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핸드폰 화면에는 인터넷뉴스가 한 건 떠 있었다.
‘샛별’ 오이카와 토오루(21), 연이은 무릎부상… 선발전 참가 불투명
헤드라인 한 줄로써 모든 것이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우시지마 씨,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시라이시가 말했다. 드디어 우시지마를 내려주게 되어 안도했다는 투였다. 우시지마는 그러나 세단에서 내릴 생각이 없었다. 시라이시는 그런 우시지마와, 우시지마의 핸드폰 화면을 번갈아보더니 울상으로 변했다. 기어코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우시지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이카와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선배가 제 목을 조르면 꼭 막아주셔야 합니다.”
시라이시의 얼굴이 끝내 창백하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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