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고 예선이 끝나고 그들은 교제하기 시작했다. 나란히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일이 계기였다.
센다이 시내에서 오이카와와 우연히 마주쳤다. 시라토리자와와 아오바죠사이는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조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6년 내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가 비로소 마주친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때 오이카와는 뿔테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안경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안경을 쓰는군?”
“보면 몰라?”
그들의 첫 번째 사담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화제는 배구도 경기도 아닌 외모에 대한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퉁명스레 대꾸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그는 혼자였다. 서로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으므로, 둘은 못 본 척, 모른 척 상황을 넘길 타이밍을 놓쳤다. 미야기의 초겨울은 냉랭했고 둘은 서먹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는 눈을 굴리다가, 마침 발부리에 걸린 돌멩이를 툭 찼다.
“...너희 졌더라?”
오이카와가 물었고,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 내 충고를 새겨들었어야지.”
카라스노를 조심하라던 충고를 말하는 것이다. 오이카와가 우시지마에게 무언가 충고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늘 충고하는 쪽은 우시지마였으니까. 그런데 그 충고란 게 지금은 꼭 농담 같았다. 우시지마는 동의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웃기다고 느낀 건 오이카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니, 피차일반인가. 나도 네 말 하나도 안 들었으니까.”
“...그래. 너는 시라토리자와에 왔어야 했다고... 이제는 이런 충고도 못 하겠군.”
우시지마가 대꾸했다. 오이카와는 얘가 무슨 소릴 하나 싶어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피식 웃었다. 얼마간은 재미있다는 듯이. 좋은 신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우시지마도 웃어버렸다. 십 대가 저물 무렵이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긴 시점에는 오히려 전에 없던 여유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이게 웃기냐? 져놓고도 웃음이 나오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이카와는 함빡 웃는 것이다. 우시지마는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걸 느꼈다. 이번만큼은 오이카와와 우시지마 두 쪽 다 공평하게 패배했다는 게 어떤 공감대를 만들었을까. 필시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6년간 변변한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과 웃고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변변찮았던 6년간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봤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그간 우시지마에게 보여주었던 적대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떤 벽을 허물고 그 안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다시 기회가 있을까. 웃음의 끝에 우시지마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말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엉?”
우시지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약간 얼이 빠져 대꾸했다. 오이카와는 자기가 지금 잘못 들었냐는 표정이었다.
“뭘 다시 봐?”
“너를, 오이카와.”
우시지마가 분명한 답을 들려주었다.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는 건 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고통이 무엇으로 기인했는지 이해했으므로. 오이카와가 분위기를 타서 긍정적인 대답을 들려줄 것이냐, 그런 것까진 우시지마의 계산에 들어있지 않았다. 단지 지금이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과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
오이카와는 입을 딱 다물었다. 우시지마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벌거벗겨진 듯, 잠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지나갔다. 우시지마는 그에게서 쏟아질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시없을 순간일 테니까.
“뭐... 못 볼 건 없지.”
그러나 오이카와의 대답은 완전히 뜻밖이었다. 우시지마는 놀라서 대꾸하지도 못했다. 오이카와는 코끝을 긁적이더니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핸드폰 줘 봐. 번호 모르지?”
얼떨결에 오이카와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두 개를 번갈아가며 번호를 입력했다. 우시지마는 빠르게 움직이는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핸드폰에 자신의 이름을 뭐라고 저장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입력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핸드폰에는 우시지마의 이름을 우시와카라고 입력했다.
“졸업하기 전에 한번 보자.”
핸드폰을 돌려주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그럼 간다.” 하며 걸음을 옮겼다. 우시지마는 뒤돌아서 오이카와가 인파 속에 섞여드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엄청난 도박을 건 셈이었다는 걸, 오이카와는 알았을까. 졸업하기 전에 한번 보자는 말은 결국 보기좋게 어겨졌다. 한 번 만났던 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첫눈이 내릴 무렵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미야기에서의 마지막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흘러갔다. 우시지마는 지난 6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조금 더 드러내어 오이카와를 사랑했고, 믿을 수 없게도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와 끌어안는 일을 좋아했다. 자기보다 커다래서 좋다는 게 이유였다. 데이트 후에 헤어질 때가 되면 오이카와는 말없이 우시지마를 안아오곤 했다. 우시지마는 때로 그것이 모순일까, 아니면 단지 국면이 전환된 것일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오이카와였다면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번번이 자신을 좌절시킨 상대가 아닌가. 늘 상처주는 말밖에 건네지 않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좋아질 리가 없었다. 아무리 우시지마가 오랫동안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도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등을 안았다. 둘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거듭난 것은 오이카와의 공이 컸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둘은 고교 마지막 겨울을 보냈다. 불가해함으로 시작했던 관계는 결국 불가해함으로 끝났다. 그들의 첫 번째 겨울이 가기 전, 오이카와가 이별을 선고했다. 그럼 잘 가라며 우시지마에게서 돌아섰다. 우시지마와 함께할 이유가 더는 없다는 듯했다.
우시지마는 일본을 떠나서도 종종 오이카와 토오루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의 끝은 늘 그런데 왜 헤어졌더라, 하는 의문으로 귀결되었다. 오이카와는 늘 우시지마가 무디다고 타박했었다. 덮어놓고 좋아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까. 우시지마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에는 이미 수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오이카와와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과거를 언급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바로잡을 방법이 전무해진 시점에 다다라서는 그 기억을 떠올리는 일마저 거리끼게 되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회고하는 빈도가 차츰 줄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이고 그 위에 눈이 쌓였다. 그렇게 추억은 사장되었다.
서른이 다 되어 오이카와와 재회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불가해하고, 여전히 솔직하며, 우시지마가 모르는 사정을 안고 있었다. 오이카와 말마따나 그들이 사귀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를 사랑했던 흔적은 심지어 우시지마 자신에게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사소한 버릇 하나라도 기억하지 못했다. 키스도 했던가? 섹스도 했던가? 두 번째 질문은 오이카와의 도발일 것이나, 두 사람의 과거는 기억하려 애쓴 다음에야 간신히 생각나는 그런 것이 되었다. 오이카와의 말이 옳았다. 그들에겐 증거가 없었다.
오이카와의 큼지막한 눈동자가 가까이에 보였다. 올려다보는 시선엔 어떠한 욕구보다도 왜?라는 물음이 가득했고, 우시지마는 여전히 말주변이 없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다가갔을 때에도 오이카와는 그저 눈꺼풀을 깜박일 뿐이었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야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향수가 달큼한 향을 품었다는 걸 깨닫는다. 정말로 우시지마는 오이카와 토오루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지도 모른다.
와인잔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우시지마는 그저 꿈쩍없이 서 있는 오이카와에게 키스하겠다고 고개를 숙였고, 오이카와는 그저 키스를 받을 뿐이었다. 밀어내지도 다가오지도 않으면서 그것만은 허락하는 것이 우시지마에겐 퍽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언제 다시 기회를 줄지 몰랐다. 오이카와가 키스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그 나름의 시험이라 해도 좋았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원했으면 원했지 결코 밀치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 역시 기분좋기를 바라는 것까지는 욕심일 테지만.
오이카와를 소파로 이끌었다. 이끌었다기보다 밀쳤다는 표현이 옳다. 우시지마는 마침내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오이카와를 끌어안았고, 오이카와는 미처 그 힘을 버티지 못했으므로.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의 몸 위에 올라타서 키스했다. 상기된 숨결에는 와인향이 섞여있었다. 또한 뜨거웠다. 몸이 달아있다는 증거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혀를 얽으며 오이카와의 미약한 신음소리를 들으면서는, 그들이 과거에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키스를 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관람차의 기억이 떠오른다. 첫키스였을 것이다. 무릎이 닿는 것만으로도 설레어서 심장이 마구 뛰던. 그때와 같은 떨림은 없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떨림이 지금, 여기에 있다. 우시지마의 머릿속이 혼곤했다. 오이카와의 팔을 끌어 자신의 목에 둘렀다. 마지못해 오이카와가 그의 덜미를 안았다. 입술을 떼고 오이카와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나른하게 깜박이는 눈과 붉게 달아오른 입술이 시야 가득히 보인다. 우시지마는 양껏 키스했다. 오이카와가 말하는 그 증거란 게 없다면, 이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건 내 미련의 증거라는.
결국 힘들다며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가슴을 밀어냈다. 오이카와는 버틸 만큼 버텼는지 숨을 갈무리하려는 시늉도 하지 못했고 눈도 뜨지 못했다. 그는 입가를 문지르며 가슴을 들썩였고, 우시지마는 그 순간에도 오이카와의 감은 눈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시지마가 거기서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오이카와가 지독하게 피곤해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목까지 덮은 티를 조금 내렸다. 드러난 맨살에 입맞추었다. 입술이 다 홧홧해질 만큼 뜨거운 맥박이 선연했다. 달아있는 온도가 우시지마로 하여금 꿈을 꾸게 했다.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이제는 다시 꿀 수 있는 꿈. 뜨거운 온도와는 정반대로 오이카와의 호흡이 차츰 가라앉았다.
잠든 오이카와를 안고 침실로 데려갔다. 우시지마는 자신이 운동선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를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재킷을 벗긴 뒤 벨트를 끌렀다. 구두끈을 풀고 양말도 벗겨주었다. 몸이 편해진 오이카와는 잠결에 좀 뒤척였다. 푹신한 이불을 덮어주자 구겨졌던 미간이 비로소 평평해졌다. 우시지마는 가까이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잠든 오이카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에는 오이카와의 깊은 숨소리뿐이었다. 우시지마가 조심스레 손을 뻗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럴 권리가 있던가? 오이카와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조금 쓸어본다. 오이카와는 다시 뒤척이며 이불을 조금 밀어냈다. 고개가 우시지마 쪽으로 떨어졌다. 우시지마는 다시 오이카와가 조용해지길 기다렸다가, 이불 밖으로 나온 그의 손으로 향한다. 반지가 끼워져있는 왼손이다. 우시지마는 아주 조심스레 그 반지를 벗긴다. 반지는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손가락에서 너무도 쉽게 빠져나갔다. 증거는 인멸됐다. 우시지마는 가만히 그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평평하고 좁은 띠로 원을 그린 금속이다. 보석알은 작아도 초라하지 않다. 반지의 몸집에 정확히 어울리도록 재단되었고, 그게 또 오이카와의 시원스런 외모와 잘 어울렸다. 어쩔까.
생각 끝에 반지를 오이카와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하게 잠들어있다. 우시지마는 한 팔로 오이카와의 머리맡을 짚고는 몸을 기울인다. 다문 입에 입술을 지그시 누른다. 한숨이 터져나왔다.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오이카와는 깨지 않고 푹 잤다. 우시지마가 몰래 입맞췄던 증거는 남지 않을 것이다.
기억의 다락에서 먼지가 조금 털어진다.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와의 겨울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둘은 고등학교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광장에 요란하게 장식된 트리를 올려다보며 오이카와는 고백했다.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계속 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다고. 그건 오이카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우시지마는 자신이 오이카와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교만했는지 깨달았다. 우시지마가 이해했던 것은 오직 오이카와의 미움뿐이었다. 당시 우시지마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나 역시 오래 전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말해주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웃었다. 우시지마는 둘의 관계에서 생살여탈권을 쥔 쪽은 누구인지 분명하게 느꼈다. 온화하게 웃는 밤색 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유독 추웠다. 대륙 북방에서 찬 기류가 일찍 밀려왔기 때문이다. 둘은 관람차를 타겠노라고 바깥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평범한 데이트를, 자신이, 오이카와 토오루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바보같다며 웃는 오이카와 얼굴에 또 웃음이 났었고, 결국 그들은 폐장 직전 관람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 맞은편에 앉았더니 무릎이 닿았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옆자리로 옮겨갔다. 둘이 앉으려니 허벅지가 맞붙었다. 관람차가 삐걱 흔들렸고 오이카와는 깜짝 놀라 핀잔을 주었다. “갑자기 움직이면 어떻게 해?” 그러나 우시지마가 손을 잡아오자 오이카와는 조용해졌다. 눈이 마주쳤다. 모든 불가해함을 에둘러가는 순간이었다. 관람차가 서서히 원형의 궤도를 오르고 그 정상에서 잠시간 머물렀다가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올 때까지 둘은 입을 떼지 않았다. 우시지마에겐 첫키스였다.
*
“이런 미친...”
우시지마가 셔츠를 꿰어입고 있을 때였다. 날이 밝았고,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맞춰둔 알람에 맞추어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간밤에는 내내 잠을 설쳤고 자다 깨다 하다가 결국 알람보다 30분 먼저 눈을 떴다. 오이카와는 그러나 잔뜩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야?”
오이카와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시지마는 시간을 보고 일러주었다.
“일곱 시 십삼 분.”
“아, 미쳤지.”
“...미쳤다고 할 것까진 없잖아.”
우시지마가 대꾸했다. 오이카와는 그러나 버럭 화를 냈다.
“나 다섯 시에 일어났어야 해. 내 핸드폰 어딨어?”
그러고 오이카와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시지마는 단추를 잠그다 말고 오이카와의 재킷을 찾았다. 그걸 가져다주려 했지만, 오이카와가 빨랐다. 오이카와는 침대에서 풀쩍 뛰어내려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부터 걸었다.
“...여보세요? 난데, 나 사고쳤다. 지금 일어났어.”
바닥에 구겨져앉아 오이카와는 이마를 마구 문질렀다.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갔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미치셨어요?” 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상대는 시라이시인 듯했다. 오이카와는 한동안 입을 딱 다물고 후배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으응, 그렇게 됐어. 미안한데 토비오한텐 네가 연락해줄래? 그리고 차 갖고 우시지마 호텔로 좀 와줘야겠다. 9시 반에 조찬회 있는데 지금 아무것도 준비 못 했어... 응, 메이크업 키트도 차에 그대로 있어. 그러니까 차부터...”
시라이시의 타박도 잠깐뿐이었다. 지금은 위기에 놓인 선배를 수습하는 일이 먼저였으므로, 오이카와가 몇 가지 지시를 내리는 동안 그는 토를 달지 않았다. 통화는 짧고 간결했다. 오이카와는 통화를 끝내고 바로 다른 연락들을 확인했다. 오이카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즉시 또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안녕하세요, 오이카와인데요.” 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은 오이카와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때일 것이다.
응접실엔 지난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이카와의 발치로 떨어뜨릴까봐 그렇게나 노심초사했던 와인잔이 테이블에 뒹굴고있고 소파엔 구김살이 가 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가 나오기 전 그것부터 치우기로 한다. 곧 오이카와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우시지마가 쿠션을 주워 소파에 놓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
“욕실 좀 쓴다. 입을 옷 있나 봐봐.”
그렇게 말하고 오이카와는 욕실로 쑥 들어갔다. 우시지마는 그 말뜻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오이카와가 입을 만한 옷이 있는지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시지마가 입을 옷이야 옷장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 하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을 것이다. 오이카와가 걸친다면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헐렁할 텐데. 오이카와 성격에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외출하는 건 얼굴에 먹칠하는 일로 여길 것이다. 우시지마는 빠르게 결론내렸다. 즉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30분 후 시라이시보다도 먼저 도착한 수트 한 벌을 보고, 오이카와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게?”
“네가 입을 옷.”
우시지마가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키높이로 들고 사이즈가 괜찮을지 가늠했다.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내 고용주가 네 어머니인 거 알지?”
“내가 네 옷에 와인을 엎질렀다고 거짓말했다.”
“아침부터 와인을 마셨다는 게 말이 돼?”
“아무려나.”
“다신 너랑 술 먹나 봐라.”
오이카와가 씩씩거렸다. 그러면서도 수트를 받아드는 그였다. 욕실로 들어갔던 오이카와는 손에 젤을 조금 묻혀서 바로 나왔다.
“무릎 굽혀봐. 네 머리 좀 어떻게 하자.”
우시지마는 순순히 따랐다. 오이카와의 눈높이에 맞추어 무릎을 굽혀주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고, 오이카와는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이제 머리손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는 오이카와의 손길은 신중하고 부드러웠다. 제 머리카락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눈을 우시지마는 마음놓고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막 일어났을 때만 해도 눈이 부은 것 같더니 샤워하는 동안 부기가 다 빠져있고, 머리는 우시지마보다도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자기관리에 있어서는 허점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케어하는 일 역시 잘 하는 것일까. 우시지마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우시지마의 머리칼과 눈썹을 정돈한 후에야 오이카와는 수트를 갈아입었다. 그는 전신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어머니에겐 오이카와의 신장과 몸무게를 대충 말했을 뿐인데 옷은 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꼭 맞았다. 클라이언트인 우시지마는 거의 준비되었고, 자신의 옷까지 깔끔한 검정 수트로 맞춰입고 나자 오이카와는 한결 진정한 것처럼 보였다.
“외투도 있나?”
오이카와가 우시지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그는 아차 하는 우시지마의 표정에서 답을 읽었다.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시라이시였다. 오이카와는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우시지마 일행은 조찬회 1시간 전에 장소에 도착했지만, 시라이시와 오이카와는 한숨도 돌리지 않았다. 파킹브레이크를 채우자마자 시라이시는 그날 행사의 참석인사를 일러주기 시작했다. 첫날의 리셉션보다도 중요한 사람들이 많이 온다며 말이다. 그가 언급하는 유명인사의 이름은 우시지마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제 일처럼 생각해주는 사람 앞에선 듣는 시늉이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오이카와는 메이크업 키트를 펼쳐 우시지마의 얼굴에 이것저것 바르기 시작했다. 손등에 무슨 액체를 짜서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바르는데 참 이상야릇한 기분이었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을까, 그는 웬만한 클라이언트보다 화려한 매니저라는 것. 옷장에서 적당히 고른 우시지마의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것만 봐도 그랬다. 사이즈가 큰데도 허리끈을 조이고 맵시를 다듬으니 오이카와 토오루를 위한 옷 같았다. 언제 뿌렸는지 어제의 그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미약하게 섞여있는 달큼한 향은 지금처럼 가까이 다가가야만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십 대 시절엔 파우더 향을 썼던 것 같은데.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정면으로 빤히 들여다보는데도 그는 우시지마의 얼굴 외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시라이시의 브리핑이 끝나자 오이카와는 그들의 일 이야기를 했다. 오이카와가 그날 일찍 사무실에 들렀어야 했다고 걱정하자 시라이시는 가슴을 쭉 폈다.
“그거 제가 처리해놨어요. 어제 야근하다가 겸사겸사 했으니 망정이지.”
“땡큐. 밥 살게.”
“그리고 토비오 씨는 제가 연락하니까 오이카와 선배부터 찾던데요.”
“그게 하루이틀인가.”
“어, 이제 올라가보세요. 9시 25분이에요.”
“가자, 우시지마.”
오이카와가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비로소 첫 스케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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