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혁명의 날개에 발간될 <짧은 시간의 역사&부서진 꿈의 잔해> 시리즈 안내입니다.
나이역전 엘런x리바이, 망국의 소년왕 리바이와 호위기사 엘런의 이야기.
전편 34p, 후편 40p, 규격 A5로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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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도 더 전에, 소년왕의 순수를 축원하는 흰 백합이 붉게 오염되었던 일을 기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폭풍의 한복판, 제 키의 세 배는 되는 붉은 망토를 어깨에 두른 채, 소년은 등 뒤에서부터 진격하는 군대를, 아비의 가슴이 꿰뚫리는 장면을, 왕국이 함락되는 장면을 하나하나 바라보고 있었다. 즉위식을 거행하던 중 그는 그렇게 멈춰서야만 했다.
새 나라의 젊은 왕은 영리했다. 그가 즉위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옛 왕국의 흔적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법도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궁의 구조도 바꿨다. 숙청작업 왕국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왕의 혼인식을 거행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었고, 폭풍의 끝에 남은 것은 새 왕의 권세뿐이었다. 단 하나, 새 왕은 옛 왕국의 흔적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마지막 남은 왕실의 핏줄이었다. 옛 왕국의 왕자와 손위의 공주. 새 왕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아량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옛 왕국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는 명목으로, 새 왕은 그들을 왕실 한쪽에 기거하게 하고 작위를 하사했다. 내심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 즉위식 날 폐위되었기에 왕도 아니고 왕자도 아닌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했던 것이다. 소년왕이 될 뻔한 자는 궁에서 백작으로 정의되었다. 또 망국의 왕자라 정의되었다. 실수로라도 그를 왕이라고 불렀다간 징벌을 면치 못했다. 왕좌에 오르기도 전에 끌어내려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자라는 신분은 ‘망국의’라는 수식어가 붙어서 힘이 없었고, 누이는 공주였지만 여인이어서 힘이 없었다. 망국의 공주는 새 왕국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자결했다. 왕자는 다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망국의 왕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망국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새 왕의 아량은 넓고도 좁았다. 같은 아첨이라도, 왕의 기분이 좋을 때면 충성의 증거였고 왕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역모의 전조였다. 새 왕의 손끝에서는 사람이 쉽게 죽고 쉽게 살았다. 말하자면 새 왕은 폭군이었다. 왕의 비위에 어긋난 자에겐 심판이 내려졌고, 운 나쁘게도 젊은 기사는 그것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젊은 기사는 왕의 북방 정벌계획에 대해 한 마디 첨언했을 뿐이었다.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더 피폐해질 것이니 조금만 미루는 것이 어떠하온지요. 신분은 미천하고 겨우 기사 작위밖에 없는 주제에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이 잘못이었다. 다행히 그때는 왕의 기분이 썩 나쁜 때는 아니어서 당장 목이 날아가진 않았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기사에겐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성에 남아 있는 백작 왕자를 담당하라는 것이다. 평범한 직무이동이었지만,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기사는 암담했다. 망국의 왕자와 함께 하라는 것은 마치 그도 망국처럼 천천히 노쇠해 가라는 말과도 다름없게 느껴졌다. 기사의 나이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망해가는 집안을 일으켜보겠다고 악착같이 그 자리까지 올라갔건만, 단 한 순간 말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왕궁의 말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독하게 살아보겠다고 반란까지 가담했던 일이 무색했다. 기사는 누구를 탓할 기운도 없었다.
첫째 날, 기사는 백작에게 갔다. 백작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누이가 죽고 나서는 더욱 조용해졌다. 바깥으로 나다니는 법도 없었다. 물론 새 왕은 백작에게 아무것도 제한한 바가 없다. 다만 백작이란 칭호를 던져주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뿐이었다. 백작이 말이 없으며 대부분 탑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주목받느니 숨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한때 왕자였던, 그리고 하마터면 왕이 될 뻔했던 자로서 체면이 용납하지 않을 거였다. 백작의 공간은 불문율처럼 왕궁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백작이 사실상 새 왕의 포로나 다름없으며 새 왕이 그런 식으로 그를 말려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알았다. 마치 실을 꽁꽁 묶어서 사마귀가 저절로 떨어져나가게 두는 것처럼 말이다. 백작의 탑은 왕궁의 서쪽 끝에 있었다. 그것마저 새 왕의 철저한 계산이었다. 새 왕의 거처는 동쪽, 즉 해가 뜨는 방향이었다. 매일 저녁이면 새 왕은 지는 해를 보며 슬그머니 웃을 것이었다. 백작이 원체 조용하기도 했고 그의 성정에 대해선 거의 들은 바가 없었기에, 백작을 알현하기 직전 기사는 긴장했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해 들은 소문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백작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있었다.
기사의 백작에 대한 첫인상을 말하자면 그가 왕위에서 끌어내려질 법도 하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망토를 걸치지 않은 그는 지나치게 작았고 왜소한 체구가 그를 더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도 그를 보고 왕자라 생각지 않을 것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 기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열여덟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동안이었다. 나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무정한 표정이 그가 말 못할 내력을 가지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아직 눈빛만은 고고한 그였다. 기사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만은 가히 왕족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는 그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예를 갖추었다. 그것은 완전히 허울뿐인 몸짓이었고 그 말 속엔 어떤 진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백작은 망국의 왕자였고, 너무 힘이 없어 숨 쉬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는 소년에게서 기사는 아무것도 수여받을 것이 없었으므로. 잘 보여 봐야 얻을 것이 없었기에 진심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기사는 정중히 절했고 그는 고고하게 뒷짐을 지고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기사의 출신가문을 들은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 이름을 언제 들어보았는지 더듬어보는 듯했다. 그의 생각이 따라잡을 수 없이 길어지기 전에, 기사는 자신의 가문이 본디 사냥꾼에 약초쟁이이며 신분이 미천해 백작께선 잘 모르실 것이라 둘러댔다. 백작은 피식 웃었다. 기사는 물러났다. 인사를 마치고 문 밖에서 경비를 서며 생각해보니, 그건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백작은 자신이 백작이라고 불렸음에 노기를 띠었던 것 같다. 망국의 왕자라도 아직 자존심은 남아 있는 모양인지.
둘째 날, 기사는 아침과 점심, 저녁식사를 차례로 올렸다. 알고 보니 백작의 식사시간마저도 철저히 그를 농락하도록 조작되어 있었다. 왕의 일과보다 반시간쯤 빠르거나 느렸다. 대중없이. 백작은 하루 세 번, 소연회장의 긴 테이블 상석에서 홀로 식사했다. 포크와 나이프와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때는 백작이 드물게 소음을 내는 때였다.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끼니마다 음식은 차고 넘치도록 차려졌지만 백작이 식탁을 떠날 때도 접시는 그득했다. 음식을 먹은 티가 나지를 않았다. 기사는, 저러니 자라다 말았지, 하는 불경한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기사가 그 생각을 세 번 하니 날이 저물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 백작의 탑과 소연회장은 별개로 떨어져 있어 식사 때마다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백작은 정원에서 잠시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탑으로 돌아갔다. 백작은 너무 초라해서 오히려 그를 지키는 기사가 다 민망했다. 하다못해 화려한 휘장이라도 두르고 있으면 좋으련만 싶었다. 그 조그만 검은 뒤통수를 기사가 내내 좇았다. 방에 올라가기 전에 백작은 욕탕에 들렀다. 욕탕은 지하에 있었고 백작의 방은 탑 꼭대기에 있었다. 백작은 그런 불편을 감수해가면서 여태까지 버텼다. 다가올 혹한에는 어떻게 버틸지. 질기다면 질긴 목숨이었다. 기사가 백작 같았으면 치욕감에 칼을 뽑고 설치거나 할복이라도 해서 진작 일을 쳤을지도 모른다. 백작의 누이가 자결했듯이. 욕탕에 도착했을 때야 기사는 시녀를 시켜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숙한 기사로 인해 백작의 목욕은 반시간쯤 지체되었다. 황망한 마음은 진심이어서 기사는 어쩔 줄 몰라 했고 백작은 그런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왕족의 목욕은 혼자서는 절대로 거행되지 않는 거사였다. 아침에 세안하는 데에만 시종이 셋은 따라붙었고 목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백작은 망국의 왕자였기에 그를 그렇게까지 시중드는 사람은 없었다. 기사가 욕탕의 나무문을 지키고 서 있는데 안쪽에서 목욕물이 참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습기에 찬 돌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사는 자신이 왕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렸던 대가를 아주 달게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때 정점에서 갖은 영화를 누리던 자의 몰락을 지켜보는 일은 그만큼 유쾌하지 못했다. 결국 기사는 백작에게 직접 시중들게 해달라고 청했다. 대답이 없는 것을 허락으로 알았다. 기사는 겉옷과 신발을 벗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욕탕은 최소한의 구색만 갖추고 있었다. 은은한 촛불 대신 기름 냄새 나는 횃불이 벽에서 타고 있었고 나무 욕조는 정확히 1인용이었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들통이 주변에 몇 개 높여 있었다. 백작은 입구를 등진 채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작아서 두 손으로 다 감쌀 수 있을 것 같은 어깨가 수면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기사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타월을 적셔 그의 어깨부터 문지르기 시작했다. 백작의 오른쪽 날갯죽지에서 흉터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울퉁불퉁 번들거리는 살점으로 덮여 있는 것이 영락없는 화상 자국이었다. 왕족의 옥체엔 흠집 하나 없게 마련이었지만. 붉어진 피부는 얇기까지 해서 조금만 세게 문지르면 죽죽 벗겨질 것 같았다. 차라리 백작은 욕조에서 삶아지고 있다는 게 옳았다. 기사가 백작의 가느다란 팔을 조심스레 들어가며 문지르는데 그가 물었다. “흉터. 뭔지 안 물어봐?” 기사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대답했다. “말씀하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백작은 기사 쪽을 힐끗 보는가 싶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기사는 사실, 그 휘갈긴 것 같은 흉터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왕위를 계승할 왕손의 몸에는 왕가의 문장이 낙인찍히는데, 새 왕은 그것을 자신의 문장으로 덮어버렸을 것이었다. 태양처럼 빨갛게 달궈진 인두로 살을 태우는 것이다. 새 왕은 그만큼 잔인하고 또 철저했다. 백작은 가만히 시중을 받다가 기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사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셋째 날, 백작은 잠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기사는 해가 다 뜨기도 전에 백작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백작은 벌써 깨어 있었다. 그건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새까만 백작의 눈가가 떠오르며, 기사는 그가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길은 어제와 같았다. 구색만 갖춘 시종 둘과 기사가 동행했다. 식후에 기사는 백작에게 산책할 것을 권유해 보았지만 그는 됐다고 했다. 대답 직후 작게 따라붙은 “내 땅도 아닌 것을.” 하는 혼잣말을 기사는 분명히 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백작은 낮에 대부분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식사 시간은 어제보다 약간 일렀다. 백작에겐 매일 목욕하는 사치도 용납되지 않았다. 기사는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 힘없는 팔다리가 뜨거운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하루, 계속해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백작의 방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 보니 백작은 쇠창살이 덧대어진 창문을 한 손으로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가 물었을 때, 백작은 방 안에 공기가 부족한 것 같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짧게 대답하면서 그는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팍을 긁었다. 처음 보는 백작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호흡곤란이 오기 직전의 모습. 기사는 급히 말했다. “오늘 달이 밝습니다.” 맥락 없는 말이었기에, 백작은 붉어지다 만 얼굴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평생 그렇게 밝은 달은 처음 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말은 멋대로 조합되어 튀어나왔다. 기사는 당장 백작에게 바깥바람을 쐬어주고 싶었다. 그런 구실이라도 없으면, 백작은 자기의 땅도 아닌 곳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피울지도 몰랐다. “가시지요.” 하고 기사는 방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기사의 뜻이 통했을까.백작은 잠시간 기사를 쳐다보더니 다리를 움직였다.
사실 기사는 그날 달이 떴는지 어쨌는지도 몰랐다. 기사는 되는 대로 말을 지어낸 것이라,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보초를 물리고 탑 꼭대기에 올라서자마자 기사는 절망했다. 달무리가 부옇게 껴서 아무리 좋게 봐도 밝다고는 할 수 없는 달이었다. 백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가 정말로 왕이었다면 기사는 능멸죄로 당장 혀가 잘린대도 할 말이 없었다. 백작은 무심히 말했다. “이게 네 평생 가장 밝은 달인가?” “죄송합니다. 그... 아까까진 밝았는데...” “아까가 언제지?” “그러니까... 저녁 즈음해서...” “웃기는군. 오늘 저녁 내내 달은 이랬어.” 말하며 백작은 기사 쪽을 흘끗 보았다. 놀랍게도 백작의 얼굴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제야 기사는 백작이 거짓말에 속아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작 역시 누군가 적당한 명분으로 자신을 빼내주길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기사는 하나마나 한 변명을 하느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가슴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인 망루에서, 백작과 기사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돌벽에 올려둔 백작의 손가락이 하얬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창백했다. 핏기라곤 조금도 없는 흡혈귀처럼. 차가운 밤바람이 백작의 얼마 되지도 않는 체온마저 앗아간 것처럼. 그러나 백작은 흐린 밤하늘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몸이 으슬으슬 추울 법도 한데, 그런 것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듯이. 기사는 제복 외투를 벗어서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래도 추운 것보단 낫습니다.” 백작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기사의 옷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천한 놈의 것이라도 옷은 옷이지.” 백작은 음울하게 말하면서도 옷을 추슬렀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얌전히 돌벽 위에 올려두었다. 아무리 덜 자란 소년이라지만 그의 손은 가늘기도 가늘었고 작기도 작았다. 백작은 모든 것이 다 터무니없이 작은 사람이었다. 그 백작이라는 호칭도. 나이도. 어깨와 손마저도. 그래서 존재도 작은 사람. 그런 사람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망국의 왕자 앞에는 가시밭길밖에 없었다. 기사는 만약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백작의 손이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의 손이었다면 따뜻하게 잡아주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백작은 불쑥 말을 걸었다. “네 얘기 좀 해봐. 뭐 하던 놈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기사는 백작의 옆에 선 채, 분부에 따라 말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는 사냥을 하며 살았단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백작이 오랫동안 밤공기를 즐길 수 있도록.
넷째 날, 아침부터 날이 맑았다. 근래 가장 맑은 날씨였다. 그러나 괜찮던 기분은 대신들의 회의장에 들어서는 순간 구름처럼 흐트러졌다. 회의에서는 기사에게 백작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기사는 백작께선 별 탈 없이 잘 계시다고, 대강 뭉뚱그려 대답했다. 잘 계시다는 말에 비웃음이 돌아왔다. 거 참 질기기도 하신 명줄이로군. 노골적인 조롱을 견디는 것은 온전히 기사의 몫이었다. 때마침 전령이 회의장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기사는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좋았다. 전령은 급히 소식을 전했다. 왕비께서 조금 전 출산을 하셨습니다. 대신들이 벌떡 일어설 정도의 희소식이었지만 기사는 발밑이 아찔했다. 새 왕의 핏줄이 하나 늘었다는 뜻이다. 백작의 입지를 좁힐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뜻밖에 안 되었다. 왕비는 순산했다고 했다. 대신들은 바로 연회를 준비하자고 떠들기 시작했다. 기사는 홀로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백작의 탑으로 향했다. 어젯밤 자정이 넘도록 망루에서 머물렀던 탓인지 백작은 늦잠을 잤다고 했다. 백작이 제대로 잠을 잤다는 뜻인 것 같아서 기사는 백작의 늦잠이 기꺼웠다. 그것만으로 백작의 얼굴은 한결 맑아져 있었다. 달무리가 가신 달처럼. 백작은 기사의 문안인사를 받았다. 백작의 방에서 기사는 구겨진 이불과 탁상에 흐트러진 책 따위를 정리하며 말했다. “조금 전 왕비께서 아기씨를 낳으셨답니다.” 그것이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화젯거리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사는 그 순간을 빨리 넘겨버리고 싶었다. 백작의 시선을 피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내아이인가?” 백작이 물었다. “공주이십니다.”
백작은 제자리에 주저앉지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도 않았다. 창문에 달린 쇠창살 너머를 바라보며 기사를 물릴 뿐이었다. 백작은 부르기 전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기사는 새로 태어난 왕족이 그나마 사내는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위로할 작정이었지만 그럴 경황도 없었다. 방 바깥에서 귀를 기울였지만 백작의 조용함은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백작의 속내까지 고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사는 백작의 안으로 삭혀질 고통이 우려되었다. 백작은 기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백작은 점심식사도 걸렀다. 견디다 못한 기사는 본궁으로 가서 시녀 하나를 붙잡고 왕실의 식량고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백작에게 차를 올리고 싶은데 찻잎을 직접 고르고 싶다는 설명을 곁들여서. 아둔한 시녀는 백작이 누굴 일컫는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물어물어 식량고에 도착해, 기사는 그곳에 진열된 차를 모조리 꺼내어 향을 맡아보았다. 관리인이 싫은 내색을 했지만 기사는 신중한 선별 끝에 질 좋은 찻잎을 골라냈다. 홍차 따위가 백작을 얼마나 위로할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기사는 서둘러 탑으로 돌아가 다기를 구비해서 백작의 문을 노크했다. “홍차를 좀 가져왔습니다.” 들어오라는 허락은 없었지만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갔다. 그리고 백작의 곁에서 부산스레 차를 우려냈다. 투명한 찻주전자에 적갈색 찻물이 우러나기 시작했다. 멍한 백작의 얼굴에 기사는 다급해져서 아직 우러나지도 않은 차를 백작의 잔에 따랐다. “드셔보십시오. 기분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러나 백작은 찻잔을 바라만 보다가 기사에게 빈 의자에 앉을 것을 지시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백작은 찻잔에서 눈을 떼며 기사를 쳐다보았다. 그건 부탁에 가까웠다.
“누이는 공주였어. 지금은 없어진 나라의 공주였지.” 하는 말로 백작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죽은 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무래도 오늘 태어난 공주가 누이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 것 같았다. 백작은 상대가 기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다 뺏기고 났을 때, 내가 유일하게 시도했던 일은 누이를 결혼시키는 거였어. 그러면 누이는 이 궁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자유로워지는 거야. 하지만 부마가 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누가 그러더군, 늙은 공주를 누가 데려가겠냐고. 그런데 내 누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 겨우 열아홉이었어. 누이의 혼삿길을 막은 건 나이가 아니었어. 누이가 망한 나라의 공주인 게 문제였지.” “......” “누이가 자결한 건 어쩌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몰라. 진짜 늙은 공주가 되기 전에 스스로 시간을 멈춘 거니까.” “......” “죽기 전에 누이는 내게 살아남으라고 말했어. 나는 왕가의 정통한 핏줄이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는 한 우리 왕국의 역사는 계속되는 거래. 내 누이는 잔인도 하지.” “......” “누이가 미워.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나도 진작 끝장을 봤을 텐데.” 백작은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한 어조로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기사는 처음으로 듣는 지극한 개인사였다. 백작은 그 말들을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백작도 처음부터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닐 거였다. 기사는 새삼, 백작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말로 백작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심지어 백작은 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역사씩이나 되는 거대한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가. 얼마간의 침묵 끝에 백작은 말했다. “그 놈이 오늘 공주를 얻었다고 했지. 그 애에게 저주가 내려졌으면 좋겠어. 그래야 공평해.” 사실 백작의 말은 입에 올리는 그 자체로도 저주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쁜 것은 백작이 아니었다. 아직 십대에 불과한 백작의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이렇게 터트리게 만드는 자가 나쁜 것이다. 기사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백작의 말을 모조리 섬겨들었다.
*전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빛은 연한 재색 구름에 걸러져 지상으로 쏟아졌다. 공기 중에는 아침 안개까지 엷게 끼어 있어서 시야가 온통 부옜다. 왕국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항구도시가 차츰 깨어나고 있었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 팽팽히 당겨지는 밧줄 같은 것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온통 희끄무레해서 잘 볼 수 없다.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다. 눈을 감으면 코와 귀가 깨어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바다의 향기가 몸속까지 전달되었다. 바다의 겨울 냄새가 좋았다. 거기에는 응결된 서리의 냄새와 살라지길 기다리는 마른 나무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창문을 열고 깊이 호흡하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냄새가 실려 왔다. 잠시 그렇게 하고 있으니 뺨이 차게 식는 느낌이 좋았다. 폐부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눈을 뜬다. 조금 전까지 몽롱하게 매달려 있던 잠기운이 가셨다. 창가에는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서 앉아 있었다. 세상의 흰 빛은 모두 끌어당긴 듯, 나비는 날개가 몹시도 희었다. 이 추운 날에 나비가 어디서 왔나. 날개를 떠는 나비를 가만히 바라본다. 날개의 결도 꽃잎처럼 고운 나비였다. 신기한 마음에 손가락을 뻗자, 나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날아가 버렸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나비를 내쫓은 것 같았다. 또 내 탓이구나,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쉰다. 나비의 무게만큼 마음이 조금 더 밑으로 가라앉는다. 세상의 잘못된 일들은 전부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빠져나간 숨의 무게만큼 다시 몸이 가벼워졌다. 꼭 그만큼 숨은 다시 들어왔지만. 무연히 항구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멀리서도 네가 눈에 들어온다. 너를 곧잘 찾아내는 내 눈이 신통하다. 너는 아침일을 하고 있었다. 막 도착한 상선의 물품을 부두로 실어 나르는 일. 너는 노역이라면 안 해 본 것이 없다더니,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익숙해 보인다. 이 순간 너를 처음 본 사람은 네가 영락없는 뱃사람인 줄 알 것 같다. 뱃사람이라기에 행색은 단정하지만. 너는 배를 들락거리며 상자를 한 번에 한 개나 두 개씩 나르고 물품별로 구분해 수레에 차곡차곡 싣는다. 너는 손이 빌 때마다 머리를 쓸어 올린다. 어제 저녁 네가 앞머리가 길었다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데, 아마도 길어진 머리가 거추장스러운 모양이다. 너는 일을 하다 말고 누군가에게 다가간다. 그는 일꾼들을 곁눈으로 보며 물품을 확인하고 장부에 무언가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너는 그에게 말을 건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네 표정이 좀 험악해진 것으로 보아 일이 힘드니 삯을 더 쳐달라는 흥정을 하는 것 같다. 그러다 너의 얼굴이 똑바로 보인다. 네가 나를 발견한 것이다. 너는 대화를 끊고는 나에게 무어라 소리치며 손짓한다. 추우니까 문을 닫으라는 뜻인 것 같다. 말은 들리지 않아도 비난하는 어조라는 것만은 알아져서, 네 잔소리가 길어지기 전에 문을 닫는다. 그러자 거친 바람에 긁힌 유리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부두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고민 없이 일어선다. 외투를 입고, 머플러를 두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협상이 결렬되었는지 타결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조금 더 가까이서 네 잔소리를 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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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평생 시종이 따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림자가 서너 개씩은 따라붙곤 했다. 이제 그림자는 두 개다. 내 등 뒤에 드리워진 검은 그늘과 나를 수행하는 너. 네가 왜 시종이 되길 자청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종종 묻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너는 간단히 대답한다. 그냥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싱거운 대답은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말해준다. 너는 내게 빚진 것이 없는데. 나는 네게 베푼 것도 없고, 단지 권력자로 태어났을 뿐이었다. 권력을 잃은 나는 네 앞에서 고귀함을 논하기에 부끄러웠다. 나는 사실 알고 있다. 네게서 대접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을. 다 잃은 나는 네게 존칭을 듣는 일조차 부끄러웠다. 마음으로는 너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하지만 너는 내가 하지 못하는 일만 골라서 한다. 너는 새벽같이 일어난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선을 맞는 일은 하지 못한다. 대신 나는 너와 함께 일어난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한다. 어떤 때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너를 바라보기도 한다. 네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네가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본다. 따라할 목적은 아니고, 최소한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위하여. 나는 너를 이해하려 한다. 네가 알려주는 것은 뭐든.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보통 백성같이 행동하려 애쓴다. 너는 이런 나를 잘 알아서 가끔씩 나를 놀린다. 우리가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는 빵이 나무에서 열린다고 말했었다. 너는 명령만 하면 진수성찬이 대령되는 왕족의 삶에 대하여 무언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빵이 무엇을 재료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고민 한 번 하지 않고 죽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버터와 달걀을 섞은 밀가루반죽이 불 속에서 부풀려지고 구워지는 것을 안다. 너에게 빵나무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당황하던 네 표정이 기억난다. 너는 아무 나무나 골라서 그것이 빵나무라 했다. 나는 그것에서 호밀빵이 열리는지 롤빵이 열리는지 물었는데 너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롤빵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너 몰래 웃었다. 가을이 되면 거기선 롤빵이 아니라 도토리가 열릴 테지. 나는 네 사소한 거짓말이 좋았다. 적어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우리가 몇 주째 머물고 있는 마을은 커다란 항구도시다. 매일같이 상선이 드나들고 새로운 물건을 실어 날랐다. 왕궁에 있을 때는 기다란 두루마리나 장부에 적힌 교역품의 목록을 읽고, 나라의 무역 규모를 추측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항구에는 아주 멀리 떨어져야만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는 배들이 즐비하고, 그것들은 커다란 돛을 펼치고 도시에서 도시로,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한다. 나는 그만한 물자들이 다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신기했다. 그것도 매일같이 말이다. 배는 어떻게 건조하고, 짐을 얼마나 실을 수 있으며 어떤 원리로 물에 가라앉지 않는 것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졌다. 나는 나 혼자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너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두 사람의 머리로도 대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너와 함께 도시를 전전하는 동안 나는 살아났다. 이제는 하루에 세 끼를 챙겨 먹고 식사 때마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다. 하나일 때와 둘일 때의 차이는 그렇게나 컸다. 가끔씩 나는 네가 없었다면, 내가 계속 혼자였다면 하는 가정으로 시작해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갖가지 형태의 끝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혼자보다 둘이 낫다는 것이 매번 결론이었다. 오히려 너는 나에게 잘 따라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그 가끔씩의 가끔씩, 너는 내 뺨에 입을 맞춘다. 미지근하고 물렁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각은 언제나 낯설다. 네 말로는 그것이 백성들의 인사법이라 했지만 어쩐지 나는 목이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나는 한동안 얼굴에 입 맞추며 인사하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있었다. 연령이 비슷한 남자와 여자 사이가 아닌 한, 입맞춤 직후에 얼굴을 붉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나는 입맞춤을 얼마 전부터 받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기에 태연자약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시간이 지나고 네 입맞춤이 익숙해지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은 마땅한 시일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네가 일하는 모습을 줄곧 구경했다. 보다 못한 나는 네 만류를 무릅쓰고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짐을 날라서 네 일감을 덜어주려 했다. 너는 나를 말리느라 힘이 빠지겠다고 투덜거렸다. 그날 일은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야 일단락됐다. 곳곳에서 장정들이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허리에 손을 짚고 말했다. “오랜만에 한몫 잡았어요. 오늘은 외식할까요?” “그래, 그러면 네가 요리하는 수고를 덜겠구나.” 그랬더니 너는 내 뺨을 쥐었다. 웃는 듯이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 또 그 순간인가 보았다. 너는 나를 대견하게 바라보지만 나는 네가 도대체 무엇을 대견해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순간. 엉뚱하게도 나는 왕궁의 박사에게 작문숙제를 잘 했다고 칭찬받은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영문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또 네 입이 뺨으로 다가올 거라 생각하니 긴장되었다. 이런 일은 남부끄러우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너는 쓰다듬듯이 뺨을 매만진다. 나는 말 잘 듣는 착한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너는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너는 그냥 웃어버렸다. “저녁 먹으러 가요.”
구름 같은 달무리를 대동한 밤이었다. 그날 일과는 배불리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머무르는 방은 침대가 하나였다. 처음엔 경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내가 밤을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그 방을 골랐지만 시간이 지났어도 우리는 방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너는 먼저 침대에 올라갔다. “힘든 하루였어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너는 하품을 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빤히 바라보자 네가 한다는 질문은, “아직도 악몽을 꾸세요?” 겨우 그런 거였다. 그런 것 하나 묻는데도 망설일 만큼 너는 배려심이 깊었다. 나는 그러나 대답하지 못했다. 내 입으로, 아직도 악몽에선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하면 내가 영락없는 어린애임을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슬리퍼만 내려다보고 있자 너는 얼른 말했다. “죄송해요,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앞으로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너는 상냥한 방식으로 대화를 마무리해 주었다. 그리고 너는 금세 잠들었다. 나는 조심히 네 옆에 누웠다. 이불을 추스르며 보니까 내 발은 네 종아리 중간 정도에밖에 미치지 않았다. 너와 비교되는 내 작은 발이 부끄러워 얼른 이불로 덮어버렸다. 나는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네 손을 찾아 잡아봤다. 굵직한 손가락이 바로 얽혀왔다. 너를 방해하는 것 같아서 손은 금방 빼버렸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난 데다 종일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몸이 좀 지쳤다. 네 숨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희미한 밤처럼 미미한 잠결 속에 잠겨 있다가, 놀라서 눈을 뜬다. 그 짧은 사이에 악몽을 꾸었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너를 향하여 비스듬히 누웠다. 내가 나쁜 꿈에 절여지는 동안에도 너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너는 깊이 잠든 것이 확실했다. 나는 손을 뻗어 네 뺨을 쓰다듬는다. 해가 질 때 네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깊은 밤에만 너를 만져본다. 네가 나를 보고 있지 않으므로 이런 때는 부끄럽지가 않은 것이다. 네 뺨은 찬바람을 맞았기 때문인지 미미하게 돋은 수염 때문인지 좀 거칠었다. 너는 신분을 제외한다면 뭐든 나보다 뛰어났다. 심지어는 턱까지도. 네가 내 나이였어도 나처럼 턱이 미끈할 것 같진 않았다. 어느덧 나는 한 가지 생각에 함몰된다. 어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우고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밤이 이슥해지고 아무도 울지 않는 시간, 우리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를 둘러싼 갖가지 허물들을 벗겨놓고 보면 너는 성인 남자고 나는 성년식도 못 치른 소년이었다. 그뿐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네 입술에 입을 맞춘다. 너에게 입술을 겹친 채 가만히 숨을 쉬어 보았다. 투박한 일만 하며 살아온 너에게도 연한 살이 있었다. 물론 누구도 아닌 너에게 도둑처럼 몰래 입 맞추는 일은 떳떳하지 못했다. 네가 잠든 틈에 너를 속이는 자신은 치졸하다. 양심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올바르지 못한 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왜인지 가슴은 착실히 뛰었다. 입 맞추지 않고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밤에도 그랬다. 몰래 너에게 마음을 쏟았지만 마음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나는 네가 나에게 입 맞추었던 감각을 떠올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나는 그 부위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잘 길들여진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네 가슴에 팔을 둘렀다.